불의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는 신앙을 묻다
– 국제성경연극선교단 제4회 정기공연 전율의 잔
김은균 편집장
디트리히 본회퍼는 20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신앙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나치 독일에서 국가 권력과 타협한 교회를 향해 침묵은 곧 동조라고 외쳤다.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행동하는 실천가였던 그는 유대인 학살과 전쟁 범죄를 방관하지 않았다. 끝내 고백교회를 조직해 저항의 길로 나섰고 히틀러 제거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서른아홉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순교 서사가 아니라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값싼 은혜를 거부했고 책임을 감수하는 믿음을 강조했다. 그의 신앙은 기도실 안에 머무르지 않았고 불의한 역사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국제성경연극선교단이 제4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이는 전율의 잔은 바로 이 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와 신앙을 무대 위에 옮긴 작품이다. 이 연극은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베리힐이 집필한 희곡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기 나치 독일의 현실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외친 한 인간의 고뇌와 선택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위인전이 아니라 오늘의 관객에게 나는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작품은 젊은 신학자 본회퍼가 히틀러의 나치즘이 독일 사회와 교회를 잠식해 가는 현실을 목도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 권력에 순응하고 침묵하는 가운데 그는 고백교회를 조직해 저항의 신앙을 선언한다. 설교와 강연 신학교 운영을 통해 나치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폭로하지만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점점 높아진다. 결국 그는 반히틀러 저항 조직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감옥 안에서 신앙과 인간적 고뇌 사이의 싸움을 겪는다. 작품은 그의 체포 심문 투옥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며 자유와 책임 믿음과 침묵 순응과 저항의 갈림길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본회퍼는 육체의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하나님의 뜻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관객은 그 선택의 무게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국제성경연극선교단은 행동하는 신앙을 모토로 삼는 선교 예술 단체다. 이들은 설교나 교리 전달에 머무르지 않고 연극이라는 살아 있는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 성경적 가치와 역사적 인물을 무대 위에 재현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도록 이끄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들에게 연극은 하나의 신앙 실천이다. 믿음은 말씀이 아니라 삶이라는 신념 아래 이들은 예술을 통해 책임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본회퍼의 정신을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에게 다시 묻는다. 교회가 권력에 침묵하거나 정권의 논리에 순응할때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그러나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정중한 요청으로 다가온다. 완전무결한 신앙인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자는 경건한 다짐이다. 연극을 만드는 이들 또한 그러한 태도를 몸으로 실천하는 존재들임을 연극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이번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한 최종률 연출은 과도한 영웅화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본회퍼를 한 인간으로 그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웅장한 무대 장치나 과잉된 감정 표현 대신 절제된 동선과 담백한 대사를 통해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다. 조명과 음악은 나치의 폭력성을 과시하기보다 본회퍼의 고독과 사유의 시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감옥 장면에서는 공간을 극도로 단순화해 관객이 외부 상황보다 인물의 내적 성찰에 몰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수의 전율의 잔 이미지와 본회퍼의 수난을 병치함으로써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신학적 성찰의 장이 되도록 하는것이 연출의 목표인 것이다.
이 연극은 관객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도 침묵하지 않았던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오늘 무대 위에 올려 행동하는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 연극 전율의 잔은 연극이 곧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