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 침묵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 삶의 무도회〉
김은균 편집장
■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시간의 무도회’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침묵을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삼아 삶의 군상을 다시 불러내는 작품이다. 말의 부재는 곧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배우들은 회사원, 청소노동자, 학생, 노숙자, 장애인 등 우리가 도시의 흐름 속에서 스쳐 지나치는 얼굴을 하고 무대 공간을 채운다. 그들은 걷고 멈추고 다시 걸으며 서로의 삶을 침묵 속에서 비춘다. 천사의 깃을 단 노숙자의 이미지는 이 작품이 지닌 중심축으로 작동하며, 인간 존재의 양가적 힘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다. 언어 없이도 공간 전체를 울리는 신체의 진동, 멀리 들려오는 경적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옷깃의 떨림, 바닥과 신발이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까지 모두가 서사로 변한다. 관객은 말하지 않아 더 또렷해진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어느 순간 작품과 함께 흐르는 존재가 된다.
■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시간의 회복
이 작품은 결국,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쳐온 얼굴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일종의 회복의 장치이다. 바쁜 일상에 밀려 무심히 지나쳤던 존재들의 체온이 침묵 속에서 되살아난다. 관객이 배우들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작품을 마주하는 방식은 극장에서의 일방적 관람을 해체한다.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저 사람을, 저 표정을, 저 움직임을 온전히 바라본 적이 있었는지 조용히 묻는다.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들리지 않던 인생의 소리들—풀벌레의 미세한 울음, 바람의 속삭임,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는 발자국—이 침묵의 틈에서 다시 살아난다. 작품이 끝날 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이 군상들과 같은 호흡을 공유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무심했고, 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되짚게 된다.
■ 김아라 연출가와 2025년 신작의 의미
한국 전위연극을 오래 이끌어온 김아라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그간 축적해온 무언극의 미학을 박물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결합시킨다. 말보다 이미지가 먼저 움직이고, 몸이 언어를 대신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입체적인 감각으로 확장된다. 배우는 서사를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사 자체가 되어 공간을 걷는다. 김아라는 신체의 리듬과 군상의 흐름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도시적 감정을 직조하며, 언어 이전의 인간적 감각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2025년 신작으로서 이 공연은 그의 연출 언어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확인시키는 사례이기도 하다. 40여 년간 유지해온 감각적 실험이 박물관이라는 공공적 장소성을 만나며 더욱 확장되었고,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작품 속을 함께 통과하는 존재가 된다. 김아라의 이번 연출은 한국 공연예술이 공간과 관객, 연출의 경계를 다시 정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언극이라는 형식은 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드는 연극의 본질을 새롭게 드러낸다.
■ 한국 공연예술인들이 만들어낸 집단적 신체성
이번 공연에는 박정자, 강만홍, 이정희를 비롯해 장재승, 김기민, 박소정 등 다양한 세대의 배우들이 참여한다. 이들의 신체는 단순한 역할 수행이 아니라, 작품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살아 있는 조각들로 작동한다. 논리적 대사 대신 반복되는 걸음, 자연스럽게 머무는 시선, 군중 속에 묻히는 숨소리가 배우 각각의 서사가 된다. 김아라 연출 아래에서 이 배우들은 개별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군상’으로 통합되며, 한국 공연예술이 가진 집단적 신체성의 힘을 온전히 드러낸다. 연출팀과 영상, 조명, 사운드, 오브제 디자이너 등 모든 창작진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무언극임에도 강렬한 심리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 2025. 12. 17(수) & 12. 20(토) 오후 6시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
□ 출연진 박정자 강만홍 이정희 김선화 박호빈 최경원 장재승 김기민 박소정 최홍준 임소영 김은미 권로 이동준 안성채 김기령 홍윤경 윤경원 유승화 박상은 주인서 |특별출연 남명렬 최수진 박지일 이당금 박성찬 김은균
□ CREATIVE / STAFF
연출/재구성 김아라 번역/김원익 제작감독/이경래
영상/김태은 작곡/신나라 오브제/도나정 조명/신호 사운드/김준하 분장/김선희 사진/임종진
연출부/김은미 최홍준 박상은 무대감독/이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