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파트에 말이에요, “세탁! 세탁!” 이렇게 외치고 다니는 심부름꾼이 있었데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안 들려요, 곁에서나 겨우 들을 수나 있을까? 그런데 석 달이 지나니까 잘 들려요. 6개월이 지나니깐 아파트 전체가 다 들려요. 무슨 말인고 하니 매일매일 훈련한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1924년 9월 29일생인 장민호는 황해도 신천에서 장로 아버지와 권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행사 때마다 연극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과 가까워졌다. 그는 해방되던 해에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왔다가 38선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현철 선생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거리에서 극단 원예술좌의 창단 공연 <모세>의 주인공을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이에 응모하여 첫 데뷔작에서 주인공을 맡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연극 <모세>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대단하여 여러 날 동안 지방공연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지방공연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 서울중앙방송국의 성우로 합격이 되어 굵직한 목소리로 청취자들을 사로잡기도 했다. 장민호는 1968년 제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을, 1996년에는 대한민국예술대상과 예술원상, 제23회 한국방송대상 남자탤런트상을 각각 수상하였으며, 1997년에는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 1999년에는 제21회 동랑 유치진연극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장민호는 우리나라 방송과 연극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에 국민훈장 모란장과 보관문화훈장, 2010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각각 수여받았다. 장민호는 1966년 이후 무려 26년 동안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1969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14년 간 국립극장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방송연기자협회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198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91년에는 연극배우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선생님 집안 배경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희 집안은 황해도 신천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아버지가 장로시고 어머니가 권사셨지요. 제가 둘째 아들인데, 학교는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까 집은 신천이지만 자라고 공부하고 한 것은 재령이었어요.
그때는 일제 강점기라 한국말로 공부를 안 하고 전부 일본말로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면은 벌을 세우던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 왜학을 충실히 받아왔지요.
연극을 접하시게 된 계기는?
그게 교회하고 좀 관계가 있는데, 아버님이 그 지역에 교회를 세우시고 손수 교회를 운영하다 보니까, 그 아들인 내가 중학교 다니고 할 때니까 뭐 성탄절이다 그래서 행사를 하지 않습니까? 근데 나는 중학교 다닐 때에 그 교회 강당에다 이제 뭐 ‘축! 크리스마스’ 이렇게 써서 붙이기도 하고 간단한 성서에 관한 얘기를 연극으로 꾸며가지고 토막극 같은 것을 어른들과 같이 하면서 그런 작업을 한 것이 말하자면 연극 계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조선배우학교를 다니셨지요?
대학 진학을 위해서 서울로 왔는데, 서울에는 마침 친척 되는 고모님 댁이 계셨고, 또 사촌형이 있고. 사촌형은 그때 당시 야구선수였어요. 그래서 모 회사의 야구선수, 야구부에 있었고, 그래서 생활도 편했고. 그래서 대학 진학을 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삼팔선이 점점 굳어지고, 이제 왕래가 불편해지고 완전히 막히다시피 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공부는 해 보겠다는데 벌이가 안 되니까 학비 조달이나 여러 가지가 불편해서 고민 하던 중에 그 마침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현철 선생이라고 우리 신극계의 말하자면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일본서 전부 공부하고 오신 그런 분이 그 최초로 인제 그 서울역 앞에다가 조선배우학교라는 것을 세워가지고 개강을 시작해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1997년 이윤택 연출의 <파우스트>에서 원숙한 파우스트 박사를 연기하는 모습
<파우스트>(1977. 6. 국립극장)
상대역은 김동원
왼쪽부터 연출자 서항석, 김동원, 나옥주, 장민호
<파우스트> 포스터
조선배우학교는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습니까?
그때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 하나도 없었고, 그런 시설을 갖추려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고, 또 그런 걸 운영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현철 선생이 일본 가서 오랫동안 공부를 해 가지고 나오셔서 인제 한국의 연극계를 위해서 그런 시설을 만들어 가지고 운영을 했습니다.
조선배우학교 설립자 현철(1963)
조선배우학교 졸업기념
조선배우학교는 지금 서울역 앞에 대우빌딩 그 자리에 빨간 벽돌집 삼층인데 그 학교가 이층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지금 기억나는 동기생이 있다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영균 씨 있잖습니까? 신영균 씨가 그때 야간부에, 야간부 학생이었고, 나는 주간부 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지고 남아있는 사람은 신영균 씨 하나예요.
수업 방식이나 커리큘럼은?
뭐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그때 그 교수는 그 현철 선생이 혼자 다 하셨어요. 그러니까 몇이 없고. 뭐 그 이론적인 거 뭐 하여간 세계연극사, 동양연극사, 무슨 연출가, 연기론이라든가 또는 실습이라든가 전부 혼자 하셨어요.
조선배우학교 졸업기념
근데 그때 당시에 그 현철 선생께서 가르치는 교수 방법이 굉장히 훌륭했어요. 그리고 아주 박식하셨고 철저하게 공부해 가지고 오셔 가지고 그 분한테 실습받을 때 제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라는 연극도 하고, 무슨 <결혼조건> 뭐 여러 가지 작품들 했는데, 제가 그때 오스카 와일드, 요한 역을 맡았어요. 제 소리가 좋고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고 “아, 너 장민호가 젤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깐 당시에 현철 선생의 교육방법이 퍽 훌륭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1947년 라는 작품이 데뷔 작품인가요?
길거리 지나다가 <모세>라는 성극을 하는데 모세 주인공을 모집한다고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이 되어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청년들이 모여서 하는 단체였는데 그 리더 격이 이보라 씨였어요. 그 분이 배우도 하고, 현대극장에서 주연도 하고 그랬는데 인제 배우 집어치우고 종교인들 모아가지고 극단을 만들어서 연극 활동을 하였던 거죠. 교회연극의 부흥을 위한다고나 할까? 작가도 교인들이 작품을 쓰고.
그래 가지고 제가 고향에서 부모도 기독교인이고 그러니까 그런 인연이 자연스럽게 맺어지면서 또 오디션 봐 가지고 합격이 돼서 첫 번 출연이 주연으로 픽업되니까 굉장히 영광스러웠던 거죠.
그러시다가 KBS에 성우로 들어 가셨지요?
지방공연을 돌고 오니까, 그때는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서울중앙방송국 하나밖에 없을 때에요. 그래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배우를 모집한다, 요새는 뭐 성우라 그래 가지고 그러지만은 그때는 성우라는 명칭이 없고 그냥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전속 배우를 모집한다고 해서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모세>라는 연극 오디션에 합격해서 주연하고, 지방 돌고 와서 방송국에서 배우 모집한다는데, 그 원서 내서 오디션 봐서 또 합격이 되지 않았겠어요.
그때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 다 가난했지만은 하루 두 끼 정도 먹는 것이 당연한 식생활의 기본이었는데, 방송국에 합격하니깐 월급을 주잖아요? 그 월급 가지고 뭐 단신인데, 월남해 가지고 친척집 신세 안 지고, 하숙집에 가서 하숙하고 편안하게 먹고 자고 술도 한 잔 먹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생활 여건이 조성되었지요.
월북한 배우 황철과도 교분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그 배우가 있었는데 그이가 황철이었어요. 그 분이 연극하는 걸 보면 그 목소리도 참 좋고, 생긴 것도 훤하게 잘 생기고.
그러니까 이렇게 무대에 등장하면은 그때는 객석이, 지금은 지정석이라서 의자에 앉지만은 그때는 의자는 적어요. 왜 그러냐면 관객을 많이 흡수하기 위해서 입석을 많이 시키지요.
의자가, 의자에 많이 앉으면 사람이 별로 못 들어 오잖아요? 그래 의잔 조금 놓고 전부 입석을 시키는데, 그래 입석을 시키면 사람이 많이 들어오면 무대에서 보면 그게 사람들이 서로 파도를 칩니다.
이렇게. 그래서 분장실에서 “야, 파도 치냐?” 그러면 “예, 파도 치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냐면, 꽉 입석이 들어와서, 사람이 많으면 흔들려요, 이렇게.
그래서 이 파도 친다 그러는데 인제, 그렇게 입석이 사람이 많은데도 황철이란 배우가 쩍 등장하면은 쫙 숨을 죽이고, 물을 끼얹은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소곤소곤 얘기해도 다 들리게끔 하는 그런 흡입력이 있는 그런 배우, 저게 정말 명배우로구나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월북을 했다고 그래요.
<세자매>
쉴러의 떼도적. 모러백작으로 출연한 모습으로 좌로부터 신구, 오영수, 오순택, 중앙이 장민호
(이윤택 연출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선생님께 연극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주는 것이지요. 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현장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 연극입니다. 기계화를 넘어서 디지털화 되어 가는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입김과 눈길이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어요.
자기를, 그리고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연극의 가치가 이런 시대일수록 도드라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물질에 맞대응 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와야 되요.
그렇다면 좋은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수많은 공연이 올라가지만 그 중에서 자신들의 영혼을 바쳐서 관객에게 확신을 갖게 할 만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지요. 그리고 어떤 내용과 줄거리든지 구성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인물들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좋은 연기가 보태진다면 좋은 공연이 되겠지요.
대본을 읽다보면 띄어 읽기에 기본적인 방법이 있는지요?
은 화술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대사와 동작과 내면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물의 내면에서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완벽히 이해한다면 마음과 대사가 함께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회에서 언어가 너무 빨리 변화되고 있음을 실감하는데요, 배우로서 바뀌어가는 무대 언어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요?
배우는 그 나라의 도덕과 문화를 책임지는 존재예요. 기형적으로 변하는 언어는 부분이지 전체일수는 없어요. 사회에 따라서 변화되는 무대 언어의 변화는 작가에게 맡기고 배우는 작품의 분위기와 연출의 의도대로 걸맞게 하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가령 같은 사극이지만 신봉승의 <파몽기>와 오태석의 <태>를 비교해 보면, <파몽기>는 고전 그대로의 맛이 있어요.
연기도 고전 사극의 전형성을 지니고 하면 되지만 오태석의 <태>는 작품의 환타지한 구성에 맞는 모던하고 절제된 연기를 필요로 하거든요. 그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배우의 감각인 거죠.
무대에서 말다리 3년이라고 사실 걸어 다니는 역할도 쉽지 않은데 무대에서 걸음걸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2009년 5월 11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집들이행사에서 연극인들과의 기념촬영
배우의 사명은 작가가 창조한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문자화된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언행과 심성, 그리고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고민하다 보면 관객이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지요. 인물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륜과 경험은 어떻게 쌓아 가시는지요?
“어떤 테크닉을 가지더라도 인격을 모방하지는 못한다”는 말이 기억이 나는데, 인격과 경륜, 교양을 갖춘 사람이 천민이나 상스러운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대로 인격과 교양 없이 신분이 높거나 훌륭한 인물을 만들어 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배우는 그러한 면면을 갖추기 위해서 평소에도 많은 훈련과 인격 연마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성이야말로 연기의 핵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국립극단 원로 단원으로서 영예의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는 모습
호암상 수상자들이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과학상 유룡, 공학상 이평세, 의학상 윌리엄 한, 예술상 장민호, 사회봉사상 월드비전 박종삼, 특별상 노벨재단 미카엘 술만. 호암상의 상금은 3억
배우는 다분히 자기 스스로 책임지는 인물 창조보다 연출가나 선배들로부터 지도를 바라는 의타심이 다분히 있어요. 비록 캐스팅되는 작업 과정이 배우를 수동적인 운명으로 도망가게 만들지는 몰라도 그러면 안돼요.
그래서 배우 스스로 인물을 창조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이성이 있어야 해요. 지적인 사고를 해서 작품 전체의 줄기와 맥을 짚을 수가 있고 거기에서 배역의 역할을 분명히 찾을 수가 있지요. 감정만 앞세우다 보면 자기 자신은 물론 상대 배역, 더 나아가 작품 전체의 리듬과 방향을 무너뜨리고 말아요. 그래서 이성을 가지고 자신이 연출자라는 입장에서 작품을 대해야 해요.
국립극장 같은 큰 무대에서도 자연스러운 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어떤 아파트에 말이에요, “세탁! 세탁!” 이렇게 외치고 다니는 심부름꾼이 있었데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안 들려요, 곁에서나 겨우 들을 수나 있을까? 그런데 석 달이 지나니까 잘 들려요. 6개월이 지나니깐 아파트 전체가 다 들려요. 무슨 말인고 하니, 매일매일 훈련한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세탁소 심부름꾼 만큼 훈련을 안 하는 것이 문제예요.
그리고 무대에서 해야 하는 언어가 따로 있어요. 일상 언어로 하면 안 되지요. 속 소리로 “너 죽고 싶어?” 하면 객석에서는 안 들려요. 속 소리처럼 말하지만 객석에서 잘 들려야 하지. 그렇게 하려면 훈련을 해야 돼요.
대사를 외우는 노하우는?
작품을 많이 해서 얻어지는 암기력도 있겠지만 나 같으면 그 인물이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대사, 입에 붙지 않는 대사, 가령 인물의 말로 녹아 있지 않고 작가의 주장이 그대로 드러나서 나랑은 생리에 맞지 않는 대사가 꼭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만 집중적으로 한 이 삼백 번을 해요. 전철을 타나 버스를 타나 화장실을 가나 말예요.
그렇게 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나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질 않아요. 그렇게 못하고 무대 연습까지 씹고 막히는 대사는 공연 끝날 때까지 막힌다구요. 꼭 그렇게 돼요. 블로킹도 마찬가지예요. 연출과 안 맞아서 블로킹이 불편할 때는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해요.
술과 연극과의 상관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내가 술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거는, 배우가 한 인물을 자기 안에 각인시켰다가 다시 백지화하는 게 어려워요. 그걸 술이 도와준단 말이에요.
또 연습장에서 못했던 이야기를 술을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할 수가 있지요. 솔직한 교류가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을 술이 제공한단 말이에요. 하기사 다 나름이겠지만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고 뭐든지 즐기면 되는 거예요.
호흡과 발성을 조절하는 방법은?
가장 배우가 경계해야 할 것은 격앙된 대사를 극적으로 앙양시켜야 할 때, 감정과 분위기에만 치우치면 호흡 조절을 못해서 결정적일 때는 힘에 부쳐요. 쉽게 말해 더 올라가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숨이 끊어지고 극적인 상황이 끊어지는 답답한 상황이 된다 말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를 지르건 속삭이든 간에 내면의 소리로 전달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에요. 내면이 있으면 1천 석도 다 들려요. 이 차이는 연극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이에요. 실천적인 것이 필요해요.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집 근처에 있는 우면산을 갑니다. 저절로 호흡이 좋아져요. 골프도 하는데 골프는 심판이 없잖아요? 자기와의 싸움인데 그런 점이 맘에 들어요.
역할 창조의 과정은?
처음으로 책 읽기가 중요해요. 자기한테 감동과 의욕을 주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어요. 자기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만날 때의 감동과 충동이 없다면 곤란해요.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면 약해지거든요. 그걸 극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고요.
연극 <백년언약>
선생님을 포함해서 좋은 배우들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또 배우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카리스마는 초능력이나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난 근간에 드는 생각이 연극은 카리스마 기질을 가진 사람의 리드 하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도 그런 기질이 있어야 무대에 섰을 때 참모습을 보이는 것이고 자기 주관적인 개성이 있을 때 공감대를 얻을 수가 있어요.
연극에 참여하는 하나하나가 카리스마적 기질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봐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휩쓸리는 배우나 연극인은 생명력이 없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