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계시는 동부 이촌동에 자리 잡은 아파트에는 두 내외가 오손도손 살고 계셨다. 간혹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일을 봐 주시고 한가로이 젖어 드는 햇살 아래로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생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집 주위를 감싸는 아늑한 기운은 크고 보이지 않는 손처럼 부드러운 기운을 자아낸다. 이는 인생을 평온하게 사신 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김동원(1916년 11월 14일∼2006년 5월 13일)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니혼(日本)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연극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1934년에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가 만들어질 때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였는데, 그는 그보다 1년 전인 1933년에 연극 <성자의 샘>으로 이미 연극에 데뷔하였다. 일본에서의 연극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그는 극단 극예술협회의 창립 동인, 극단 신협의 운영위원 등을 거치면서 연극 세계에서 활발한 활동상을 보였다. 김동원은 연기는 물론 뛰어난 행정력을 인정받아 1970년에는 연극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75년부터 4년 동안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연극계의 원로로서 국립극단 원로단원, 한국연극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1956년과 1963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이후, 1966년 예술원상, 1987년 동랑연극상, 1993년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1994년 제4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그가 우리나라 연극과 영화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여, 1972년 국민포장, 1991년 5.16민족상을 수상하였으며, 2004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는 그렇게 우리나라 연극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 2006년 5월, 아카시아꽃 향기 날리던 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긴 여행을 떠나섰다.
선생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정말이지 혈색이 참 좋으십니다.
응, 다들 그래. 젊어 보인다고. 보름 전인가 아파트 어디에선가 뒤로 넘어져서 의식을 잃었어. 그래 깨 보니 병원 응급실이데. 가족들이 모두들 와 있더라고. 누가 날 발견하고 이쪽으로 데려다 놓았는데 누군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참 고마운 일이더군. 그리고 갑자기 의식을 잃을 정도였는데 뭘 잡고 넘어 졌었는지 머리가 멀쩡해.
정말이지 Timing이 참 절묘해.
요즈음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그냥 의사가 자주 걸어 다녀야 한다고 해서 주로 산보를 많이 하고, 그리고 소식을 해야 된다고 해서 조금씩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웬만한 것 빼고는 다 좋아. 감사한 일이지.
93년 이성계의 부동산 이후로 은퇴를 하셨는데요. 그 후에는 어떻게 지내 오셨는지요?
은퇴하고 나서 가급적 안 나갔어. 괜히 나가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그렇잖아? 그냥 주일이면 예배 참석하고 가끔씩 고맙게도 방문하면 그때야 사람 만나고 뭐 그렇지. 간혹 아이들이 찾아 와 주기도 하고 말야.
특별히 연극계에선 이해랑 선생님과의 우정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해랑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내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였어. 우리가 만난 건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일이지. 그때 이해랑, 이진순이 동기였고, 과는 달랐지만 이원경 씨가 미술대학 소속이었지. 1934년 7월에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국 청년 문화인들의 모임인 동경학생 예술좌(藝術座)가 창립되었거든.
신극 운동을 표방했었는데, 보다 깊은 뜻은 조선인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를 찾기 위한 민족의식이 먼저였지.
<춘향전>(1936. 6. 일본 쓰기지 소극장) 가운데 이몽룡이 김동원
동경학생예술좌 <춘향전>(1936. 6. 일본 쓰기지 소극장)
뒷줄 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이 조택원, 그 오론쪽이 김동원
법정대 출신의 주영섭 선배를 중심으로 김정호, 장계원, 마완영, 윤형원, 김병기, 황순원, 그리고 신입생인 나를 포함한 10여 명이 창립 동인이었고, 유치진 선생이 고문격으로 지원을 하셨지.
동경학생 예술좌가 창립되던 해 가을 유치진 선생의 <소>가 동경의 쓰기지(築地) 소극장에서 올려졌었지. 신극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토월회까지 올라가지.
이 때 창립 공연으로 오른 <소>야말로 본격적인 의미의 신극의 효시였다고 여겨져. 난 이때 둘째 아들인 개똥이 역할을 했었지. 이후 2회 공연으로 <춘향전>을 했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오늘 날 내 개인적으로 연기자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라고 생각해.
아마 지금까지 춘향전의 대사만큼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외울 수가 있거든.
이 때 상대역 춘향으로 훗날 극작가인 오화섭의 부인이 된 미모의 박노경 씨가 열연을 했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평생 지우(知友)인 해랑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지.
해랑과 나는 동갑나기의 연극 동지로 비록 부모는 다르나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야.
내가 다소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다면 해랑은 유년기부터 다소 기복이 심했던 편이고, 같은 일본대학 예술과에서도 결국 나보다 한 해 늦게 졸업을 하기도 했지.
<춘향전>은 비록 학생 무대이지만 우리 신극사에 기억될 만한 좋은 공연이었어. 연기는 물론이고 분장이고 장치 등 모든 것이 수준급이였다니까.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효과음을 오케스트라의 생음(生音)으로 대체한 사건인데, 이를 위해 박용구, 함태환, 한상기 등 동경 유학생들이 총동원 됐는데 영문학도이던 오화섭 씨도 이 때 비장의 테너색소폰 연주를 하였어.
아마 내 추측이기는 하지만 동경 학생예술좌의 히로인이었던 박노경 씨가 훗날 그의 아내가 된 것도 그 흐느끼는 색소폰 연주 덕분이 아닌가 싶어.
연극 입문 계기는요?
개성에서 칠 남매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지. 위로 누님이 두 분이 계셨고 그 다음 아들을 보게 되었는데 나였어. 특별한 종교는 없었지만 아주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였지.
아버님은 양화점을 하셨는데 특별히 궁핍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러다가 보통학교 4학년 때 지금의 남대문 부근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
지금의 원효로 근방 공옥보통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긴 했지만 노래를 잘해서 그런지 선생님들의 사랑과 친구들의 관심을 사곤 했었지.
특별히 교장선생님께서 내 노래를 좋아해 곧잘 교장실로 부르셔서 오르간 반주를 직접 해 주시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곤 했었는데, 그 때 조용히 미소를 보내주시던 모습이 선해.
학교가 미션스쿨이라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성극을 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케 한 것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된 일이야. 그러다가 고등보통학교를 들어갈 시기가 되자 아버님은 내가 상업학교를 가길 바라셨거든. 그래 선린상업학교에 시험을 쳤었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하게 된 거지.
왼쪽에 배재고보 교사와 김동원, 오른쪽 위에 제1회 전국중등음악 콩쿠르 성악부 1등
차로 시험을 친 배재고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랬기에 연극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져. 교장으로 계신 아펜젤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그야말로 세련된 멋쟁이 중의 멋쟁이셨거든. 영어회화 시간을 담당하였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던 미국의 미남 배우 존 바리모어를 실제로 만난 것 같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넋이 나가 있기 일쑤였으니까. 아마 내가 옷을 세련되이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의 영향이 클 거야.
노래 말고도 특기가 있다면 육상을 잘했지. 그리고 경동교회에서 찬양대를 하기도 했어. 4학년 때인가 연희전문학교 주최로 제 1회 전국 음악 콩쿠르 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배재고보 대표로 나가서 마스네(Masnet)의 ‘悲歌’를 불렀어.
첫 무대라 떨리고 긴장을 해서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 제대로 못 불렀는데 결과를 보니까 내가 성악 부문 1등을 하게 되었더라고. 그 때부터 극예술연구회의 연극을 보면서 나름대로 꿈을 키우기 시작한거야. 극예술연구회는 유치진 선생을 비롯하여 해외 문학파인 서항석, 이헌구, 이하윤, 장기제 선생들이 이끌고 있었던 단체로 우리나라 본격 근대 연극이 기틀을 마련하고 연극을 문화적으로 격상시킨 조직이지.
우리는 곧 연극을 하고 싶어서 친구 10명 정도가 모여서 고보로서는 처음으로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지. 그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셨던 분은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으로 계셨던 임학선 미술선생님이 큰 도움을 주셨어. 창립 공연으로 유진 오오닐의 <고래>, <바보치료>, <가보세> 등 3편의 단막극을 정식으로 공회당 무대에서 올렸어. 연출은 유지친 선생님이 맡아서 이론의 기초부터 완벽히 돌보아 주셨는데, 나는 <고래>와 <가보세>에 출연을 했는데 두 작품에서 모두 여자 역할을 하였지. 아마 소리가 미성이었고 얼굴도 그 때로는 예쁘장하여 맡기시지 않았나 해.
나의 첫 데뷔작이 여자 역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조금 야릇하긴 했지만 연기자가 된다는 기쁨에 불만이 끼어들 여유가 없었지.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고 결국 최우수 연기상을 타내었지.
연극을 하시다가 또 영화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내가 처음 출연한 영화는 <밤의 태양>이라는 작품인데, 경찰관 생활의 애환을 그린 일종의 홍보 제작물이었지. 당시 수도청장이었던 장택상 씨가 적극 추천을 한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호기심도 없지 않았으니 자의반 타의반의 출연이었지. 비록 관 주도의 냄새가 나는 기획이었다고 하나 재정이 풍족하였고 연기자는 물론 모두가 그 당시로는 일류였지.
이 영화는 35밀리로 시작되는 첫 영화이었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영화와 연극이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연기 면에선 별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막상 체험해 보니 무대의 살아 있는 연기와 카메라 연기는 전혀 딴판이었어.
그 때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고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무섭게 실감했었지. 전체적 흐름이 없는 장면마다의 단속 촬영은 연기의 연속성을 끊었고 내적인 면이 완벽히 표현되지가 않았지.
이 때 어린 시절 동경해 오던 무비스타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나 할까? 아마 배우 생활을 나눈다면 처음 입문하고 연극을 했을 때가 1기가 될 것이고 영화배우로 25년 동안 활동한 시절이 2기로 나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60년대 국립극장에 복귀하고의 시간들을 3기로 나눌 수 있을 거야.
본격적으로 알려진 영화는 <자유부인>서부터 시작되어서 70년대 초 국립 극단에 몸담기까지 약 300편을 했을 거야. 간혹 과거를 반추해 볼 때가 있는데 이상하지 그 엄청난 출연작 중에 단 한 편도 만족을 느낄 수 없다면 믿을까?
그런데 이건 진실한 고백이야. 때 늦은 후회이지만 난 처음부터 무대 연기자였지 스크린 연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실제로 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무대를 잊은 적이 결코 없어. 영화가 생활 수단이었다면 연극은 삶 자체였다고나 할까?
<밤의 태양>(1948. 7) 영화 첫출연 작품 상대역은 최은희
1962년 드라마센터가 만들어지고 그 당시 쟁쟁했었던 연극 인력들이 다시 모여 다시 한 번 연극의 르네상스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50년대 말을 전후해 한동안 침체기에 있었던 연극계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계기는 5.16혁명 이후 건립된 드라마센터의 탄생에 있었다고 보여져.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1962년 문을 연 드라마 센터는 우리가 바랐던 연극의 요람이었고 본격 소극장 운동의 첫 걸음이었지.
그 때의 멤버들은 신협을 비롯해서 이근삼, 여석기, 김정옥, 양동군, 양광남, 박명희 등 해외 유학파에다 보다 젊은 층으로는 김성옥, 김동훈, 오현경, 박규채 등이 참가하였지.
개관 기념 공연으로는 신협의 역작이었던 <햄릿>이 결정되었고, 나와 최상현이 더블캐스트였고 오필리어로는 권영주, 오현주, 김보애가 클로디어스에는 장민호, 남성우가 왕비로는 황정순, 천선녀, 박명희가 교대로 출연을 했었지.
개관 기념 공연작으로 피난시절 신협의 역작이었던 햄릿이었는데, 장장 40일 간의 장기공연으로 첫 무대를 장식했었지. 드라마센터의 설계는 극장 창립자인 유치진 선생이 직접 외국의 극장들을 견학해 가면서 고심 끝에 만든 그 때로는 획기적인 것이었어.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약 그 때 드라마센터가 기대만큼 정상 가도를 달렸더라면 오늘날 우리 연극계는 더 훨씬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해.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그 때 극장 명이 드라마센터가 아닌 신협 소극장이었더라면 오늘날 신협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지.
대구에서 초연된 신협의 <햄릿>(1951. 9. 대구 키네마극장)
왼쪽부터 최무룡, 김복자, 김동원, 황정순
영원한 햄릿, 김동원
국립극단 창단에 관여하시고 그리고 은퇴도 국립극단에서 하셨는데 거기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처음에 국립극단이 만들어진 것이 1950년 정월이었을 거야. 전쟁의 포성이 목전에 임박했는데도 우리 연극계는 국립극장의 설립으로 인해 그저 들떠 있었거든. 유일한 민족극단인 극예술협회가 국립극장에 흡수된 것이 이해 정월이었고, 이것이 신극협의회 즉, 신협의 모체가 된 것이지.
1950년 4월 30일 날 부민관(府民官)에서 개관기념 공연으로 <원술랑>이 올랐었는데, 그 때까지 연극 사상 최대의 호화 무대였고 객관적으로도 부끄럽지 않는 역작이었어.
내가 원술랑 역할을 맡았고 진달래 역은 김선영이, 그리고 이해랑과 박경주가 같이 출연했고 황정순과 백성희가 새로이 가세해 각각 김유신 장군 부인인 지초부인과 공주로 분했었지.
<원술랑> 제3회 공연 인쇄물
<원술랑>(1950. 4. 30. 부민관)
국립극단 제1회 정기공연, 앞줄 왼쪽부터 김선영, 박제행,
뒷줄 왼쪽부터 박상호, 전두영, 김동원, 황정순, 박경주
워낙 대작이어서 효과를 담당한 심재훈은 전투 신에서 마그네슘 폭파가 잘못돼 중화상을 입기도 했었지. 전 단원의 이러한 열성으로 인해 일 주일 공연에 5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는데 이는 신극사상 최대의 규모일 거야.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두 번째 공연인 <뇌우>(조우作) 공연 때인데, 번역극이라는 것만 빼고는 최고의 무대라고 생각을 해. 원작이 지닌 높은 예술적인 성취도, 연출의 섬세함, 연기 무대 장치에 이르기까지 당시 이 연극을 보지 않고는 문화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지식층의 호응을 받은 것도 우리 연극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지 않나 싶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인 부민관 앞에는 연일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차고 계속되는 무더기 관중들 때문에 앙코르 공연이 불가피했었지. 당시 서울 인구가 40만인데 이 작품을 6분의 1정도인 7만 5천 명 정도 관람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아마 실감이 안 날거야.
<뇌우> 프로그램(1950. 6) 한국전쟁 발생 19일 전 무대에 올렸던 국립극단 제2회 공연
<뇌우>(1950. 6. 부민관)
선생님 하면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 불리실 정도로 햄릿에 대한 인상이 강하십니다.
1951년 피란 시절 대구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국내 초연으로 올렸었지. 이 <햄릿>은 연극무대의 고전으로 정통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만이 그 진가를 떨칠 수 있는 연극이었거든. 이해랑 연출에 김정환 씨가 장치를 맡고, 오필리어는 김복자, 그리고 황정순이 왕비로, 연출이었던 해랑이 크로디어스왕으로 분했었지.
처음 이해랑이 이 대작을 내게 내놓았을 때 난 기가 질리고 말았지. 대본을 대충 훑어보니까 이건 숫제 말해 문학이지 대사가 아니더라고. 단어 하나하나를 씹고 곱씹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함을 지닌 데에다 일상어가 아닌 품격 높은 대화체여서 암기에만 주눅이 들 정도였다니까.
게다가 연습이 일주일밖에 없는 상태에서 도무지 자신이 서질 않더군. 그의 강권에 못 이겨 열심히 하긴 했는데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 그래서 최무룡이를 대신 시키라고 하면서 대본을 팽개쳐 버리고 말았는데, 연출가인 해랑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해라” “못 하겠다”로 옥신각신하다가 연습은 고사하고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
내가 후배인 최무룡을 추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 비록 학생극이었지만 최무룡은 이미 한 번 중앙대학 연극반 시절 경험이 있었거든. 해랑이 나를 지목한 것은 지우(知友)로서의 확신이었고 나는 그의 우정을 헤아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내가 이때 이 작품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후회할 뻔했을 거야. 훗날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작품으로 햄릿을 하긴 했지만 <신협>에서 올린 이때가 최고가 아닌가 해. 신협 공연 이후로 영화로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이 국내에 소개되어서 다시 한 번 햄릿 붐을 일으키기도 했었지.
<햄릿> 공연 후 기념촬영(1951. 9. 대구 키네마극장)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해랑, 다섯 번째가 박상익, 뒷줄 왼쪽부터 네 번째가 최무룡, 여섯 번째가 황정순, 일곱 번째가 김동원, 아홉 번째가 김복자, 열한 번째가 고설봉. 뒷스태프들이 입고 있는 군복이 이채롭다
햄릿을 맡으셨을 때 연기적인 부분은 어떻게 끌고 가셨는지요?
내가 햄릿을 처음 본 건 동경 유학 시절 신축지 극장에서 일본 최고의 연기자로 꼽히던 센다(千田是也)와 야마모토(山本安英)가 각각 햄릿과 오필리어로 나오던 작품이었는데, 그 때 아직 아마추어인 나에게 비친 센다의 연기는 너무 학술적인 자기도취에 빠져 회의하는 인간상 표현에만 급급하다 보니 내면의 깊이가 결여되고 표현 자체에도 확실치 못한 아쉬움이 들더라구.
그래서 내가 햄릿을 맡았을 때 이때의 생각도 나고 해서 연출과 합의하기를 ‘고뇌하는 햄릿’이 아니라 ‘행동하는 햄릿’으로 가자고 했었지. 아마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에 악센트를 둠으로써 더 강렬한 연기가 나오지 않았나 해. 나중에 영화로 나온 것을 보니까 로렌스 올리비에도 내 쪽에 더 가깝더라니까.
일본 연극배우 센다 고레아(1935)
일본 신쓰기지 극단의 <햄릿>(1935, 쓰기지 소극장)
공연장면 왼쪽부터 센다, 야마모토
주로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전에는 아침에 꼭 용산 가족공원을 산보를 했는데 이쪽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오후 느지막이 인근 초등학교까지 가서 산보를 해. 열심히 걷다 보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지. 그 밖에 특별한 방법은 없는 듯해.
간혹 취미가 있다면 화초 가꾸기 정도랄까. 정말이지 하루 종일 화초를 가꾸고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고 땅속이나 돌 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을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생기면서 삶의 의욕이 살아난단 말이야. 인간과 식물이 서로 따뜻하게 교류하고 대화하면서 새삼스레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섭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
선생님께서는 배우로서도 성공을 하셨지만 가정적으로도 누구 못지 않은 모범적인 가정을 일구셨는데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그러하셨는지요?
그때까지 배우는 사회적으로 그리 높은 점수를 받은 편은 아니었어. 왜인고 곰곰 생각해 보았더니 예전부터 천시해 온 분위기도 무시 못했지만 배우들 스스로 공부도 안 하고 조금 얼굴이 알려졌다고 하면 사생활에 바르지 못했다거나 축첩을 한다거나 했었어. 그래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한 것도 한국에 적당한 과도 없었거니와 반드시 공부를 해서 연극인으로 성공할 것과 초지일관 내 뜻을 이루자는 결심을 단호히 했었지.
아이들을 기르는 데도 가정교육이라는 것이 학교 교육 과정처럼 무슨 교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생활에 충실하려고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면을 보여주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을 했지.
은퇴공연을 마치고 세 아들과 함께(1994. 3. 25)
왼쪽부터 셋째 세환, 김동원, 첫째 덕환, 둘째 진환
자랑 같지만 아내도 가정주부로서도 100점짜리라고 생각해. 아무리 직업적인 것이라도 예쁜 여배우들과 많이 접촉하는 배우의 부인으로서는 결코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아내는 내가 배우 생활을 하는 동안 질투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자 연기의 비평가로서도 늘 내 곁에 있어 주었지.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다 잘 자라 주어 첫째 장남인 덕환이는 서울대학 정치학과를 나와 쌍용 사장으로 재직하였고, 둘째 진환은 건축을 공부하여 대우 이사로 재직하고, 그리고 막내 세환이는 가수로서도 자기의 길을 가고 있지.
셋째는 고등학교 때 생일선물로 기타를 사달라고 해서 사주었더니 순전히 독학으로 가수가 되었어. 혹은 사람들이 내가 밀어주지 않았나 하는데 배우와 가수의 길은 분명 달라 나로서는 손을 쓸 수도 없었지. 전에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김동원 간다”라며 수군댔는데 세환이가 유명해지고 나니까 “김세환 아버지 간다”로 바뀌더군.
이해랑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동원은 진흙 한번 안 밟아 본 사람이야’라는 말씀처럼 삶이 순조로우셨는데, 삶의 고비나 어려웠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그렇지, 비교적 삶이 평탄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돌이켜보면 삶의 고비가 없진 않았을 거야.
6.25 사변이 터지고 불과 닷새 만에 서울은 유린되고 이미 한강교는 끊어져 버려서 나는 오갈 데 없는 잔류 시민이 되고 말았지. 원래 나의 본가는 한강 건너편에 있는 노량진이었는데 <뇌우> 출연관계로 한동안 처가가 있는 필운동에 기거하고 있던 중이었지. 한 열흘쯤 숨어 지내려니 식량도 바닥나고 노량진 본가의 소식도 궁금해 한강을 건너가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대문 밖을 나섰지.
조심스럽게 뒷골목으로 30여 분쯤 걸어 화신백화점 뒤쪽을 돌아드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아 채길래 너무나도 놀라 돌아보니 좌익계 연극동맹의 열성분자인 백민(白民)이 “왜 다른 사람들처럼 혁명전선 대열에 솔선수범하지 않느냐”면서 그 길로 명동성당으로 연행을 해 끌려가 보니 거기는 바로 예술계 인사들의 임시 수용소로서 김승호, 최은희 그리고 지휘자인 임원식이 이미 연행되어 있더라고.
수용된 후 적색 교양교육으로 며칠을 보내다가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다는 것이 구실이었지만 그들에게 이끌려서 하루하루 북으로 향해 어느덧 38선 표지판을 넘어서게 되었지. 낮에는 자고 밤에만 움직이던 북으로의 행군이 어느덧 평양을 통과할 때는 이미 비통함을 지나쳐 체념의 상태가 되었었지.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랄까?
그러다가 어느 날 휴식 시간에 잠시 낮잠을 잤는데 꿈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아버지는 ‘무슨 천(川)’을 가라면서 인자로우신 미소를 띄우시더니 사라졌어. 그래 바로 일어나 그 기억을 수첩에 적으면서 무슨 ‘천’이라고 하신 건 분명한데 희미해서 잘 떠오르지가 않더군.
평양을 지나 얼마나 되었을까? 이 날은 새벽부터 행군에 나서 정오 때는 들판 길을 통과하고 있었지. 사실 산이 많은 북한 땅에서는 드물게 보는 평지였지. 너무 노출되는 지역이고 보니 한편으론 불안한 느낌이 들더군. 아니나 다를까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더니 여기저기서 기총탄이 무더기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바람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지.
그 전에도 여러 번 공습을 받아 보았지만 이처럼 심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내립따 그냥 논두렁에 엎드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지. “아.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어. 서울 출발 때 괴뢰군이 우리에게도 군복을 입혔기 때문에 아군들에겐 영락없이 적군으로 오인받을 수밖에. 공습이 다소 뜸해진 후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시체들만이 뒹굴고 있더라고.
단번에 공포감과 고독감이 밀려들더군. 어딘가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아 둘러보니 전방 백 미터 즈음에 아카시아 숲이 있어 단숨에 뛰었지. 그리고 개울 건너의 숲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는데 바짝 긴장이 되어 경계하려는 순간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소리임을 깨닫고 보니 명동성당 수용 생활 때부터 마음을 트고 지내던 양백명(배우 양택조씨 부친) 씨임을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야.
나이가 많은 그는 심한 해소를 앓고 있었는데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 얼싸안고 마구 뒹굴었지. 비로소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의 공습은 유엔군의 ‘순천 파라슈트 작전’이었는데 꿈 속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천’이 바로 이를 말한 것 같았어. 죽어서도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이 생각이 나더군. 돌이켜 생각하니 이 모두가 어떤 섭리가 아닌가 하고 느껴져.
일생 배우로 살아오시면서 많은 작품을 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해랑과의 관계는 언급한 그대로이고 생각이 나는 배우가 있다면 남자로는 황철과 여배우로는 김선영을 꼽을 수가 있지. 내가 지켜본 황철은 인품과 연기력 면에서 모두 뛰어난 천부의 예술인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 선이 뚜렷한 쾌남형이었으며 바리톤에 가까운 음색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그야말로 무대에서는 적격이었지.
알다시피 영화는 얼굴이 작아야 카메라 효과를 잘 받지만 연극은 그 반대로 얼굴 윤곽이 뚜렷해야 강한 인상을 주는데, 그는 이러한 외적인 조건 이외에도 낮은 목소리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맑으면서 정감이 깃든 소리라고 표현한다면 맞을까 몰라. 그리고 그의 진정한 매력은 온화한 성품과 단아한 행동에 있지 않았나 해.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갖게 하였으며 다정다감했지. 연기적인 감수성도 빨라서 만약 그가 신파 아닌 신극에서부터 시작하였더라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었으리라 확신해.
김선영은 신협의 전신인 극예술협의회(극협)에서 만났는데 1947년에 창단된 극협은 유치진 선생을 대표로 나와 이해랑, 이화삼, 박상익, 김선영, 조미령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 졌지. 나는 이 극협 이야말로 오늘날의 현대극단 시대를 여는 주춧돌이었고 민주극단으로서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를 하곤 해.
해랑과는 주연과 조연 사이의 콤비였다면 김선영과는 최고의 파트너였지 않나 싶어. 나는 다른 연기자들보다 비교적 주연 행운이 많아 여러 여배우들과 공연을 해 보았으나 김선영 만큼 동질감을 느낀 연기자는 흔치가 않았어.
그녀는 외견상으로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평범한 가정주부였지. 용모나 체격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진 점이 없는, 하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연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비처럼 날렵했고 음색은 옥쟁반에 옥 굴러가듯 그렇게 투명하였어.
그리고 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 또한 본받을 만하다 여겨져. 보통 남보다 2시간 정도는 일찍 나와 정성들여 분장을 했는데 그녀의 분장 솜씨는 정말 최고였지.
아무튼 평소 그녀의 모습과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어. 아마 배우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해.
신협 <세일즈맨의 죽음>(1957. 1. 시공관)
상대역은 최은희
<포기와 베스>(1962. 8. 드라마센터) 상대역은 오현주
이 작품을 통해서 신인 연출가 김규대가 기량을 떨치게 되었고 장민호 씨, 최은희 씨가 같이 무대에 섰었던 작품이지. 그리고 세 번째로 파우스트를 손꼽을 수 있지. 이 작품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처음에 바랐던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였어. 처음에는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악역인 메피스토펠레스를 맡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평판을 얻었던 것 같아.
이와 비슷한 예로 <포기와 베스>에서 해랑이 주인공인 ‘포기’로 분했고 내가 악역인 ‘클라운’을 맡았지. 여기서 악역을 해 보고서야 주인공 역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 그리고 연극이 앙상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어. 어떤 배역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소중한 기회였었지.
연기하시면서 기억에 남거나 호흡이 잘 맞았던 배우는 누구를 꼽으실 수 있으신지요?
해랑과의 관계는 언급한 그대로이고 생각이 나는 배우가 있다면 남자로는 황철과 여배우로는 김선영을 꼽을 수가 있지. 내가 지켜본 황철은 인품과 연기력 면에서 모두 뛰어난 천부의 예술인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 선이 뚜렷한 쾌남형이었으며 바리톤에 가까운 음색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그야말로 무대에서는 적격이었지.
알다시피 영화는 얼굴이 작아야 카메라 효과를 잘 받지만 연극은 그 반대로 얼굴 윤곽이 뚜렷해야 강한 인상을 주는데, 그는 이러한 외적인 조건 이외에도 낮은 목소리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맑으면서 정감이 깃든 소리라고 표현한다면 맞을까 몰라. 그리고 그의 진정한 매력은 온화한 성품과 단아한 행동에 있지 않았나 해.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갖게 하였으며 다정다감했지. 연기적인 감수성도 빨라서 만약 그가 신파 아닌 신극에서부터 시작하였더라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었으리라 확신해.
김선영은 신협의 전신인 극예술협의회(극협)에서 만났는데 1947년에 창단된 극협은 유치진 선생을 대표로 나와 이해랑, 이화삼, 박상익, 김선영, 조미령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 졌지. 나는 이 극협 이야말로 오늘날의 현대극단 시대를 여는 주춧돌이었고 민주극단으로서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를 하곤 해.
해랑과는 주연과 조연 사이의 콤비였다면 김선영과는 최고의 파트너였지 않나 싶어. 나는 다른 연기자들보다 비교적 주연 행운이 많아 여러 여배우들과 공연을 해 보았으나 김선영 만큼 동질감을 느낀 연기자는 흔치가 않았어.
그녀는 외견상으로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평범한 가정주부였지. 용모나 체격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진 점이 없는, 하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연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비처럼 날렵했고 음색은 옥쟁반에 옥 굴러가듯 그렇게 투명하였어.
그리고 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 또한 본받을 만하다 여겨져. 보통 남보다 2시간 정도는 일찍 나와 정성들여 분장을 했는데 그녀의 분장 솜씨는 정말 최고였지.
아무튼 평소 그녀의 모습과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어. 아마 배우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해.
1962년 드라마센터 공연에서 맡은 햄릿은 어떠하셨는지요?
보통 번역극을 할 때에는 대사의 운율이 굉장히 중요하지.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라고 원문에는 씌어 있는데 이를 그대로 번역해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읊는다면 이는 햄릿의 고뇌를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것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왜인고하니 햄릿의 문제는 죽음에 직면한 것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에 “죽느나,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표현해야만 햄릿이 하고 있는 고민의 선택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는 것보다는 번역상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우리 식의 정서로 끌어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져.
선생님의 연극관이랄까 연기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내가 고보 시절부터 배운 유치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는 리얼리즘 계통의 연극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리얼리즘 연극의 특징은 대사 전달의 엄격함에 있다는 걸 거야. 배우는 대사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아무리 큰 극장에서라도 맨 뒷자리까지 대사는 들리게 단련해야 해.
그리고 연기는 대사와 대사의 주고받는 호흡에서 결정되는데, 이는 대사와 대사 사이에서 주고받는 것과 밀고 당기는 것, 마찬가지로 배우와 배우 사이에도 적용이 되고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것은 배우와 관객 사이에 주고받는 호흡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일본에는 축지(築地) 소극장이라고 있는데 극장의 절반을 뚝 잘라서 반은 객석, 반은 무대로 양분되어 커튼으로 드리워져 있지. 커튼을 보면 포도송이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협동을 상징한다고 해. 그래서 프로씨니엄 무대에서 무대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연극을 만들 수가 있는 거거든.
나는 사실주의만이 유일한 연극 형식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형식이라고 생각해. 무대는 미화되고 신비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지. 그런 면에서 프로씨니엄 무대라는 그림틀도 필요하며 관객과는 일정한 거리도 필요하다고 봐. 물론 추함 속에 아름다움도 있지.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것들을 걸러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을 해. 모두가 발가벗기어지면 그건 현실이지 예술이 아니지 않아?
그런 면에서 나는 리얼리즘 연극을 고수하고 싶어.
예전에 어떤 이들은 사회운동을 위해서 또 어떤 이는 별별 목적으로 연극을 했다지만 나는 그저 연극이 좋아서 해왔을 따름이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