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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한 여성의 간절한 몸부림
『인형의 家』140년을 건너 탈출한 노라의 현재진행형

엑터타임즈 2025년 1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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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향한 한 여성의 간절한 몸부림  

『인형의 家』,140년을 건너 탈출한 노라의 현재진행형 

글- 김은균 (복지 tv 기획피디,공연평론가)

■ 헨릭 입센의 고전이 아닌 국민성 작가의 ‘지금ㆍ현재’의 이야기

『인형의 家』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모티프로 삼아, 고전이 아닌 ‘국민성 작가의 지금의 이야기’로 다시 구성한 현대적 재해석 작품이다.

140여 년 전 발표된 이 희곡은 지금도 전 세계 무대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작품 중 하나로, ‘한 인간의 각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인간의 자유, 자아, 사회적 억압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에서 노라는 더 이상 단순한 ‘19세기 여성’이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축제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그녀의 선택은 포장지 속에 감춰진 현실의 잔혹함을 한 겹씩 벗겨내며 관객을 불편한 진실 앞에 세운다. 남편 토르발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선택한 위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협박과 파국은 단순한 범죄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얼마나 쉽게 자기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 작품의 전체 서사는 전통적인 기승전결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는 입센 특유의 사실주의적 리듬을 충실히 따른다.

겉으로는 안정된 중산층 가정, 크리스마스를 앞둔 평온한 거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편 토르발트는 사회적 성공을 앞두고 있으며, 노라는 밝고 명랑한 아내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일상 아래에는 이미 균열이 존재한다. 과거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라가 선택했던 ‘위조’라는 비밀이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그 비밀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현실의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1막은 이 ‘완벽한 가정’이라는 외피 아래 숨겨진 균열의 시작을 서서히 드러내며, 관객에게 불안한 예감을 남긴다. 노라를 향한 협박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토르발트의 사회적 체면과 생존 본능, 그리고 노라의 불안과 공포가 동시에 조여온다. 노라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깊이 희생하며,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심리적 벼랑끝으로 몰린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부부의 ‘사랑’이 아니라, 보호와 소유, 기대와 복종으로 뒤엉킨 불균형한 관계의 실체다. 2막은 노라가 더 이상 ‘장난감 인형’으로 남아 있을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된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토르발트는 노라를 보호하기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먼저 걱정한다. 그 순간 노라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아내도, 어머니도 누군가의 ‘소유물’도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노라는 집을 나선다. 마지막에 울리는 문 닫히는 소리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140년을 건너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노라들’의 현재형 탈출을 상징하는 소리로 확장된다.

■ 연극의 메타구조를 활용한 자유로운 무대연출

이번 『인형의 家』의 연출은 단순한 고전의 재현이 아니다. 연출 정재호는 작품을 메타연극적 구조로 끌어올리며 인물과 배우, 과거와 현재, 극중극과 현실의 경계를 능숙하게 넘나들게 했다. 이로써 무대는 더 이상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내면과 사회적 기억이 교차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연출의 시선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노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 자신, 관객 자신,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무대 위 인물들은 고정된 캐릭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존재’로 변화하며, 관객 또한 더 이상 안전한 방관자가 아니다. 어느 순간 관객은 노라가 되고, 토르발트가 되고, 혹은 방관자였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인형의 家’라는 제목에 걸맞게 배우는 인형이자 동시에 인형에서 벗어나려는 존재로 구현된다. 연출은 감정을 과잉 소비하지 않고 절제된 비율과 여백을 통해 관객의 해석 공간을 넓혔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단순한 페미니즘 연극이나 사회비판극을 넘어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접근은 사실주의 거장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상시키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되, 무대의 앞면과 뒷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병치하는 방식으로 표현주의적 깊이를 더한다. 밀러가 무대 뒷면과 앞면에 ‘과거의 텃밭’을 설치해 인물의 내면과 회상을 시각화했듯, 이번 연출 역시 앞면에는 과거의 나예석의 이야기가, 뒷면에는 장민호 작가이자 현재를 더듬어가는 서술자의 시선이 교차한다.

무대 전면의 빈 공간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나예석의 시간의 장으로 설정되며, 후면의 공간은 실제 화랑으로 구성되어 그림 작품들이 직접 배치된 전시형 무대로 구현된다. 이 장치는 공연 전체를 고급스럽고 미학적으로 이끌며, 시각과 서사를 동시에 자극하는 입체적 무대 경험을 완성한다.

■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교차적인 극작술

이 작품의 중심에는 국민성 작가의 시선이 놓여 있다. 이 작품은 헨릭 입센의 노라를 그대로 가져온 이야기가 아니다. 입센의 노라를 오늘의 인간으로 해석해 옮기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 존재하는 국민성의 노라를 일단 만들어낸 작품이다.

작가는 노라라는 이름을 지우고 나혜석이라는 실존 인물을 무대 위에 불러낸다. 이 작품은 버림받은 여성이 아니라 선택한 인간의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나혜석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사상가이며 시인이며 어머니로 살아간 인물이다. 그녀는 시대에 의해 버림받았으나 동시에 스스로 시대를 배신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은 무대 위에서 노라의 내면과 정확히 겹쳐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혜석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나 연대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작가는 장민호라는 학자이자 작가의 인물을 작품 안으로 불러들인다. 장민호는 나혜석을 연구하며 그 흔적을 더듬어 따라가는 사람이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인간을 추적해 들어가는 탐색의 구조로 만들어진다. 이로써 작품 안에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나혜석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비극성의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삶을 쫓는 장민호의 현재 진행형 사유의 흐름이다. 과거와 현재는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맞물리며 한 인간의 삶을 지금의 질문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추적하는 자와 추적당하는 인물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서로를 비추며 움직인다. 이 방식은 전기극의 깊이와 추적극의 긴장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한 인간의 비극과 그 비극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이라는 두 개의 재미와 묘미를 함께 건져 올린다.

결국 이 작품은 입센의 노라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 존재하는 국민성의 노라를 무대 위에 새로 세운 인간의 이야기다.

■ 대학로 최정예가 만든 압도적인 앙상블 연기

이번 무대는 대학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한데 모여 완성한 앙상블이다. 

연기술이 아니라 삶의 시간으로 밀어붙인 연기였다. 

주호성은 장민호 역으로 작품의 흐름을 이끌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거침이 없었다. 

에너지가 일정했고 힘의 파도가 고르게 이어졌다. 장면의 중심은 늘 그의 호흡에서 시작됐다.

임은연은 나혜석 역으로 관객의 심장을 천천히 당겼다. 과장하지 않았으며 관객의 마음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감정이 무르익었다. 스스로의 인생작을 만난 배우처럼 보였다. 목사 역 캐스팅은 이 작품의 승리였다. 여무영, 이일섭, 이태훈, 김진태.  대학로 최정상 배우들이 각자의 시간과 상황에 맞추어서 출연하였는데 이들의 가세로 극은 무게감을 잡아갔으며 작품의 결은 다채롭게 표현되었다. 가장 강렬한 등장은 김용선 배우였다. 일엽 스님 역을 위해 직접 삭발을 감행한 것이다.

짧은 등장인데도 무대의 흐름을 집중시켰다. 연극이 연기술을 넘어서 구도자의 마음처럼 하나의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손선근은 최승구·최린을 오가며 리듬의 축을 만들었고 윤상현은 김우영·나경석을 맡아 다채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연기의 색감이 풍부했고 장단고저의 변화가 빠르면서도 선명하고 또렸했다. 배찬대는 이상인 역으로 주호성과 합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연기의 주고받음이 무리 없었다. 관계의 긴장이 또 하나의 서사가 되었다. 서광재의 장민호는 다른 역할로 무대를 지탱했다. 이 캐스팅은 조합 자체가 힘이었다. 대학로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들이 각자의 색으로 함께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인물들은 역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무대를 밀고 나갔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인형의 家』 에서 국민성 작가의 손끝을 만나 전혀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무대에서 노라는 더이상 19세기의 여성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숨 쉬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었다. 국민성 작가는 나혜석이라는 과거의 실존을 오늘의 나혜석으로 정확하게 되살려냈다. 이 작품은 그래서 여성 해방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 우리 앞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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