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타오르는 50년의 무대
– 이명희 모노드라마 《불의 여자》
글 – 김은균 (복지tv 기획피디, 공연평론가)
■ 연기생활 50년을 결산하는 모노드라마《불의 여자》
연기자 이명희는 1974년 연극 〈수염이 난 여인〉으로 데뷔한 이후, 반세기 동안 단 한순간도 무대를 떠난 적이 없는 배우다. 한국적인 나이로 70세를 바라보는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뜨겁고 지글지글 끓는 에너지를 품고 무대 위에 선다. 학창시절 육상선수였을 만큼 건강한 체력을 지녔던 그녀는 세월이 흘러도 집중력과 체력, 그리고 예술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잃지 않았다.
UN의 나이 계산법에 따르면 실제 나이는 자신의 나이에 0.7을 곱해 산출한다. 이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이명희의 나이는 49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49세의 뜨거운 중년의 여인으로 무대 위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명희의 이번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평생 연극 무대에서 살아온 그녀가 자신의 연기 인생 전체를 응축해 보여주는 역사적인 자리이다. 그녀의 삶과 예술은 ‘한순간의 스타’가 아닌, 무대를 위해 살아온 배우의 길 그 자체였다. 그녀는 화려함보다는 깊이 있는 무대의 여정으로 항상 우리 곁에 있었고, 연극계에서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발벗고 나서며 자신의 역할을 다해왔다.
그녀가 지닌 수많은 직함들은 그녀가 연극계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였는지를 증명해준다. 무대와 연극을 위해 헌신해온 그녀의 행보는 단순한 커리어가 아닌, 한 예술가의 뜨거운 생애를 기록한 역사이자 헌사인것이다.
■ 《불의 여자》, 내면의 불꽃을 마주하다
최승림 작, 정재호 연출의 〈불의 여자〉는 흔히 ‘사추기(思秋期)’라고 불리는 중년과 노년 사이, 갱년기를 겪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남편과 아들이 외박을 하면서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진 한 여인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모노드라마다.
주인공 박정림(이명희)은 젊은 시절 시인 황태수와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못하고 현재의 남편과 결혼한다. 그러나 현재 아들은 황태수의 아들임이 드러나고, 박정림의 아들과 황태수의 딸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가까운 혈연 간의 혼인 위기가 벌어진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하며, 그녀의 내면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친다.
이 작품은 화려한 사건 전개보다는, 한 여성의 내면과 인생의 길을 따라가는 서사로서, ‘불의 여자’라는 제목처럼 한 인간의 삶 깊숙이 타오르는 감정의 불꽃을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드러낸다.
■ 70분 동안 무대를 지배한 1인극의 힘
〈불의 여자〉는 70분간 오롯이 한 명의 배우가 무대의 모든 감정선과 서사를 책임지는 모노드라마 형식이다. 대사와 몸짓, 감정의 결을 혼자서 이끌어가는 무대는 배우의 연기력과 집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명희는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폭풍 같은 목소리로 무대를 가득 채우며, 자신의 축적된 연기 인생을 증명해냈다.
한 잔의 양주를 마시며 까만색 브래지어를 옷걸이에 거는 장면, 고독과 격정을 넘나드는 목소리와 몸짓은 그녀의 삶과 예술이 하나로 융합된 순간이었다. 단 한 명의 배우가 만들어내는 이 농밀한 집중력은, 단순한 ‘연극’이 아닌 예술혼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 예술혼과 헌신
그녀는 무대를 위해 살았다
이명희는 반세기 동안 수많은 연극 무대에 올랐다. ‘개똥이다’, ‘장미의 성’, ‘겨울 이야기’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고, 영화와 방송까지 넘나들며 대중과 만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설명하는 말은 “연극 그 자체를 위해 살아온 배우”라는 문장이다.
영국 로얄셰익스피어극단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평생 무대에 서며 명성을 이어갔듯, 이명희 역시 화려한 보상이나 스타의 길보다 무대 위의 삶 자체를 선택했다. 연극계로부터 받은 경제적 보상은 크지 않았지만, 그녀는 연극을 사랑한 만큼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을지라도, “그러면 어쩌랴”라는 담담한 생의 태도와 겹친다.
■ 불처럼, 그 황금빛 날개를 타고 — 예술과 신앙, 그리고 삶의 스펙트럼
내가 공연을 관람한 날은 대학로 연극인 광장의 어르신들께서 단체로 오신날이라서 마치 연극인 행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연극계 인사들과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명사들이 단체로 극장을 꽉 채운 풍경이었다.
노경식 회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학계를 대표하는 시곡작가 연출가 박은희, 배우 유태균, 기정수, 한보경 희곡작가 윤한수, 최송림 등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인물들이 자리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동료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또한 이명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보여주듯, 10명이 넘는 수녀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단체로 관람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연극인, 문인, 배우, 수녀님들이 한 무대 아래 함께 앉아 있는 풍경은, 그녀의 평소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을 생생히 드러냈다. 이명희는 단지 연극이라는 한 영역에 머무르는 인물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 속에서도 깊은 영성과 뜨거운 인간적 에너지를 동시에 지닌 예술가임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불처럼 뜨겁지만, 그 뜨거움은 단순한 감정의 격렬함이 아니라, 세상에 전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에너지의 결정체였다. UN의 나이 계산법으로 49세에 해당하는 그녀는, 말 그대로 49세의 뜨거운 중년 여성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 예술과 신앙, 삶과 사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 에너지를 객석으로 밀도 있게 전달했다.
이명희의 무대는 우리에게 말한다.
흔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는 것을. 그녀의 예술은 지치지 않고 견디는 삶의 언어이며, 고요한 인내 끝에 피어나는 신념의 노래이다.
우리는 이 깊은 여정을 지켜보며, 그녀의 다음 무대를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