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소극장에 자리잡은 극단 [민예(民藝)] 사무실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먼저 하자.
언제라도 할 일이면 지금 바로 하자.
어차피 할 일이면 신나게 하자”
아마도 극단의 모토이기도 하겠지만 참 좋은 말씀이라 여겨져 노트에 옮겨 적었다.
정현은 1945년 9월 14일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6.25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69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공연을 올린 연극 <망나니>로 데뷔를 하면서 기나긴 연기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능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나운서와 성악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그의 모든 재능을 종합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연극뿐이라는 생각으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였다고 한다.
그는 1973년 5월에 연출가 허규 선생과 함께 ‘전통 공연예술의 현대적 수용’이라는 목표 하에 극단 민예(民藝)를 창단하였다. 민예는 탈춤과 우리 고유의 소리를 연극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여, 연극에서의 한국적 특성을 창출해 낸 우리 연극의 선도자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1967년 제12회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연극부문 최우수남우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황희연극상을 수상하였다. 정현은 극단 민예 창단에서 보듯이 우리 고유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연극을 하면서 가무 실력도 뛰어나 서울시립 가무단과 국립가무단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연극배우협회 부회장과 한국연극협회 이사로서, 또한 극단 [민예]의 대표로서 우리 연극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정현은 연기뿐만 아니라 극단 [민예]의 연출자로서 많은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2010년 12월에 막을 올린 시사희극 <애국자들의 수요 모임>이 호평을 받으면서 연출가로서의 능력도 과시하고 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요즘 하루의 일상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보통은 개인적인 시간보다는 단원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편입니다. 지금은 <서울 말뚝이>라는 공연을 준비 중인데 월요일과 화요일은 단원들이 따로 소리와 풍물을 배우고,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함께 대본 연습을 합니다.
3월에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아직은 여유가 있는데, 그래서 작품보다는 작품에 필요한 여러 가지들을 같이 토론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얼핏 듣기로 위 수술을 받아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만?
예전에 위암을 판정받고서 위 절개수술을 했습니다. 위 기능이 상실되어 소화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 비장과 소장의 기능으로 소화를 시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그런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다섯 번씩 아주 조금씩 먹었는데,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성장 배경은?
1945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8남매 중에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감수성이 참 풍부한 분이셨습니다.
여섯 살 때 6.25가 터졌고,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초등학교, 중앙중학, 그리고 중앙고등학교, 대학도 중앙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읍에서 다녔던 유치원도 중앙유치원이었던 걸 보면 참 일관되네요.
연극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재능이 많았나 봐요. 국어 선생님은 아나운서를 권하셨고, 음악선생님은 성악과를 권하셨지요. 중·고등학교 때는 합창반을 하다가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알게 된 분이 한양대학에 계셨던 안형일 교수셨어요.
본격적인 성악 공부는 하지 못했고 연극이 종합예술이라 이 모든 것들을 충족시키겠다 싶어 연극영화과를 진학하였습니다.
2009년 연극 <맹진사 댁 경사>에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뛰어난 가창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외할아버님께서 소리에 조예가 깊으셨어요. 집안에 광대나 소리꾼들을 들이시고 늘 사랑방엔 손님들로 북적였습니다. 그 피를 어머니께서 물려 받으셨는데 어머니는 아쉽게도 재능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외삼촌께서 일본에 있다가 어머니께 일본에 유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초청장과 배삯을 같이 보내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당시 어머니께서 아프셔서 이모가 대신 우편물을 받았는데 봉투를 열어 보니까 큰일 났다 싶어서 그 사실을 감추었고, 그래서 기회가 물 건너가게 된 것이죠.
어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외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가야금이 집안에 있었는데,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어머니께서 악기를 뜯으시면서 노래하던 기억이 나는데 어릴 때였지만 그게 그렇게 좋게 보였어요. 어머니께서는 가야금을 연주하실 때면 의복도 갖춰 입으시고 머리도 곱게 빗고 나서야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참 곱다’라는 느낌이었거든요.
요즈음 관련학과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그것이 연극의 풍성함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느끼시는 점은?
저희 때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자칫 잘못하면 고급 룸펜을 만드는 학과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희는 학과 커리큘럼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따로 서클을 만들어서 작업을 했습니다.
처용극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제가 1학기를 마치고 복학해 보니까 67년에 7기생이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과내 동아리였어요. 과내에서도 열심히 한다는 친구들이 다 모여들어 지금 봐도 그렇게 연습하면서 지낸 기억들이 지금의 모습들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습니다.
4기로는 미국에 가 있는 이종한, 최영준 선배가 있었고, 6기에는 여수 MBC 사장을 지낸 오명환, KBS드라마 국장을 지낸 최상식, 그리고 7기에 국립극장에 있었던 심우창을 비롯하여 C·F감독을 지낸 도윤주, 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낸 이영규 등 좋은 인력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의 일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힘을 줍니다.
한번은 교내에서만 공연을 하다가 밖에 나가서 공연을 해보자 결의를 하고 명동 진고개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공연 도중 대관료가 일부 남았는데 주인이 완납을 요구해 와 하는 수 없이 공연 도중에 모금함을 만들어 밀린 대금을 주고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이 외부 공연이지 공연장이 워낙 영세해서 하는 수 없이 학교에 있는 조명 기재들을 리어카에 싣고 흑석동에서 명동까지 날랐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신발에 새끼줄을 묶고 짐을 날랐던 일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하는 정도로 무모하고도 열정적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면 절대로 못할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렇게 용감하게 무식하게 한 것들이 값진 재산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민예(民藝)를 창단하시게 된 동기는?
민예를 창단하게 된 것은 1973년 5월입니다.
민예는 ‘민족예술’, 혹은 ‘민속예술’의 줄임말로 우리 연극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을 하게 된 거죠. 허규 선생과 처음 민예를 만들 때 ‘전통공연예술의 현대적 수용’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극단을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목표가 크다 보니까 그것을 당장 우리 세대에 꽃피운다기보다는 그냥 밑거름을 줘서 다음 세대에 열매를 맺게 하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 멤버들은 실험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실험에서 민예로 바로 옮긴 경우는 아니었고 실험에서 활동하다 그만둔 친구들이 한동안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가 우리와 뜻이 통해서 가세를 하게 된 것이죠. 저도 극단 생활은 실험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우리끼리 모여 있어 잡담을 하고 있으면 작고하신 김동훈 대표가 손을 잡고 “여기서 농담하지 말고 무대 앞으로 와서 나 연기하는 것 좀 봐 줘”하면서 끌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민예는 우리 연극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도였었고, 당시에는 준단원 격으로 여러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양주 별산대를 배우고 탈춤을 배우는 등 훈련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는 작고하신 김동해 선생께서 맡아주시는 등 많은 공부들을 하게 되었죠. 평단 한 쪽에서는 “이게 무슨 연극이냐” 하는 힐난조의 소리도 듣기도 했어요.
흔히들 성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고요. 서양식 창법과 우리 식의 발성은 같이 하기가 불가능한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민예에서 우리 소리와 장단을 배웠고 시립 가무단에 있으면서 성악도 물론 배웠습니다. 성악을 하면서 판소리 공부를 금기시하는 것은 아마도 너무 강한 트레이닝을 통해 목이 쉬어서 그런 것 같은데, 득음(得音)의 경지에 오를 것이 아니라면 저는 판소리를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복식호흡 훈련에는 그만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발음을 끊어서 대사하는 것은 판소리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한 편견이 나오는 것은 국악과 양악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 없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이런 장르 간의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우가 작품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뀌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장르 간의 구분 때문에 자기의 역할을 가리게 된다면 이것은 잘못된 관행이라 여겨집니다.
서양식 창법과 소리의 근본은 복식호흡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똑같은데, 소리를 곱게 펴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서양 창법이고 우리 소리는 자연 그대로의 소리입니다.
서양식 벨칸토 창법처럼 배에 실은 호흡을 머리에까지 가서 두성(頭聲)을 때려서 울려주는 것이 서양식 창법인데, 우리는 말 그대로 생소리 자연의 소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너무 소리를 지르다 보면 목이 쉬는 경우가 생기는데, 우리가 소리꾼이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소리를 하는 사람이 성악을 너무 심하게 해도 목을 버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젊었을 때 소리를 하는 분들과 같이 어울릴 때 그분들이 노래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노래를 할 때 노래의 맛이 제대로 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은 소리 공부가 말의 맛을 내는데 상당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오페라를 공연하는데, 장면 중에 머슴이 주인마님에게 “마님, 마님…”하고 부르는 장면이 나와요. 이것을 무조건 서양식으로 두성을 울려서 해보는 것과 좀 성격을 부여해서 미련하게 저음으로 “마님, 마님…”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금방 판별이 될 것이라 봅니다.
흔히들 노래는 너무 아름답게 꾸며서 부르는 것이 오페라나 뮤지컬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페라에도 레시터티브라는 것이 있어서 대사하는 것처럼 노래하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요원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원인은 각각의 장르 간에 너무 경계가 심했고, 오페라나 뮤지컬의 경우는 드라마적인 훈련이 전혀 안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8년 오스트리아의 오페라단이 와서 <박쥐> 공연을 하는데 그들과 연습을 하면서 느낀 점은 성악가인데도 너무 연기를 잘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면에서 우리는 너무 공부가 뒤떨어 졌습니다.
예전에 국립창극단을 지도하다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원로 배우 분의 동작 선을 지도하다가 “선생님 조금만 팔 동작을 곡선으로 해 주십시오”하고 요구를 했다가 그 분 말씀이 “얘들아! 지금 조연출이 소리 하면서 춤을 추라고 한다”라는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드라마나 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죠. 지금은 많이 나아 졌지만 아직도 그러한 벽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일전에 오현경 형이 배우 지망생들을 위해 화술 지도를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돕고 싶어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듣게 된 이야기인데요, 뮤지컬을 하는 배우 하나가 “선생님 뮤지컬은 노래하고 춤만 잘 추면되지 무슨 화술이 필요하냐”는 조의 말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장르이건 간에 무대 예술에는 드라마가 기본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표현 방법의 목적은 진실을 나타내어야지 무조건 아름답게 잘 보여야 된다는 생각으로 연기하는 것은 음악극이든 정극(正劇)이든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예 37주년 기념공연으로 그가 연출한 <애국자들의 수요모임>의 포스터
작업하시면서 편한 연출가는?
민예를 창단한 것도 허규 선생님과 꾸준한 인연을 이어온 셈입니다. 그 분이 가무단에 상임연출로 가셨을 때도 같이 따라 갔었습니다.
배우와 연출의 의견이 서로 팽팽할 때 허 선생님 같은 경우는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시면서 그래도 절충이 안 되면 “오늘은 일단 내 방식대로 해보고 내일은 자네의 방식대로 해보세”하시고 두 방법을 해 보시면서 배우에게 더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하시죠. 그리고 연습 중에 배우 하나가 “선생님 오늘 연습하기 싫은데요”하면 그 날 연습은 없습니다.
배우를 존중하시는 것들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보통 연출가는 카리스마라는 것으로 배우에게 강요하는 편인데 그렇게 배우를 존중하는 것도 자기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연출가와 마찰을 빚을 때도 있으셨나요?
배우극장에서 <천일의 앤>의 헨리 8세 역할을 맡을 때였어요. 그 공연은 이미 일 년 전에 한 번 공연이 되었었고 저만 새로 합류하게 된 거예요.
그 전에 헨리 8세는 김길호 형님이 맡으셨는데 연출을 맡은 지금은 작고한 심회만 씨가 왕의 역할을 너무 고전적인 스타일로 끌고 가잖아요. 처음에는 저만 새로 배역을 맡은 상태라 그냥 있었는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생각한 견해를 말씀드렸지요.
저는 헨리왕이 정신적인 결함이 굉장히 많은 인물로 보았거든요. 의타적이고 그러면서도 자유로움을 갈구하면서 괴팍한 면이 있다고 보고 연출과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심회만 씨도 저의 의견에 동조를 하면서 연출도 못 꿰뚫어 본 것을 배우가 생각해 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고설봉 선생님이나 강계식 선생님 등 처음 공연에 참여한 배우 분들도 제가 연기하는 헨리8세가 재미있다고 칭찬을 해 주셨어요. 배역에 깊이 빠져 들다 보면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성격이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연습에 몰두하여야 하겠지요.
대사를 외우시는 방법은, 그리고 대사를 잊어 버려서 생긴 해프닝은?
저는 작품을 보고 전체에서 상황을 이해하면서 대사를 외우는 편입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외워지게 되죠. 무대에서 큰 실수는 없었는데 설사 대사를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너무 당황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관객은 그 상황을 모르거든요.
학생 시절에 단막극을 공연하는데 작품 중에 상대 배역이 라이터를 붙여주는 신이 있는데 라이터를 가지고 나오질 않은 거예요. 그래서 “잠깐 기다려 봐 라이터를 놓고 왔네”하면서 라이터를 가지고 오니까 아무 이상이 없이 진행이 되더라고요.
그때의 경험을 봐도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품을 하시면서 인물 성격은 어떻게 접근을 하시는지요?
예전에 <레미제라블>을 하면서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거절을 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쟝발장 역할이 일단 외형적으로 거구의 느낌을 주는데 저는 거기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물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그 인물을 잡고 사는 거지요. 키하며 눈 색깔, 외형적인 모습에서부터 차차 그 인물을 생각하면서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닮아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네의 승천>이라는 작품을 할 때 만명이 역을 맡았는데 만명이는 산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머슴이거든요. 이때는 나를 떨어 버리고 완전히 무지막지한 천덕꾸러기로 변해야 하는데 자기를 비워 내고 다른 인물로 변하는 과정이 배우의 매력이라고 봅니다.
모름지기 배우의 생명은 변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집안의 모임이 있어 친지들이 모였는데 사촌형이 제가 연극을 해서인지 며칠 전에 명동 엘칸토예술극장에서 공연을 본 이야기를 해요. “참 재미있게 연극을 보았노라”고요.
그런데 그 공연은 제가 나온 공연이라, “형 그 연극에 나 나왔는데” 했더니 사촌형이 놀라더군요.
아마 팸플릿을 샀더라면 그런 해프닝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어 변신하는 것이 연극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신이 어려운 작품일수록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예전에 문예회관을 걸어 내려가는데 누가 불러요. 보니까 김의경 선생이 “같이 차를 타고 가자”고 해서 선생의 차에 올라탔는데 노래를 틀어줘요.
들어보니까 참 인상적이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바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이었어요. 그러면서 넌지시 “어때, 이 작품 같이 안 할래?”하시기에 승낙을 했지요. 저는 당연히 작품 속의 작은 배역일 줄 알았는데 제게 주인공인 쟝발장 역을 맡기시는 거예요.
한참 고민을 하던 중에 어느 날 대본을 보내 왔는데 순전히 악보만 있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전화를 해서 “왜 대본은 안 보내시고 악보만 보내왔냐?”하고 물으니까 그게 대본이라는 거예요.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이미지에도 안 맞는 역할에다 완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해야 하는 것에 처음에 난감해 하다가 선생의 설득도 있고 해서 정말로 열심히 몰두했습니다.
사실 성악도 시창이나 청음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해서 숫제 노래를 모두 외울 정도로 부르고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성공적인 평을 받으면서도 그랬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도전에의 성취’라고 할까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 겪을수록 얻어지는 희열을 어디에다가 비길까요?
며칠 전에 박영석 씨가 남극을 도전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배우 역시도 자기가 아닌 인물에 도전해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과정이 일종의 탐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즐겨 부르시는 노래가 있다면? 노래나 공연에 얽힌 에피소드는?
흔히들 18번이라고 하는 것이 자주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는 패티김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했었는데…. 친구들과 공연이 끝나고 흥겹게 놀다 보면 부르게 되는 노래가 ‘오 쏠레미오’예요. 흥에 겨워 노래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한잔 하자고들 해요. 처음엔 주인이 만류를 하다가도 노래가 끝나니까 한잔 하자고 손님들이 줄을 서게 되고 분위기도 좋아지고 매상도 느니깐 나중에 주인이 노래를 해 주기를 바라더라고요.
충무로에 ‘백마’라는 고급 술집이 있었어요.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집이었는데, 어느 날 갔다가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일본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잔을 따라 주는 거예요. 그리고 주인이 자신도 30년 동안 장사하면서 공짜로 술을 내 오긴 처음이라면서 양주를 내오는데, 나중에는 한동안 공연하면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구경을 오는 팬이 되기도 했고요.
공연에 대한 에피소드는 1979년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쎄실극장에서 <다시라기>를 공연할 때였는데, 공연을 하다 말고 10.26사태가 나 공연이 중단이 되었고, 12월에 다시 재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12.12가 터져서 공연이 중단되었지요. 그러다가 그 이듬해 광주 5.16이 나고 망자의 추모공연으로 올린 기억이 납니다.
끝으로 연극을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칼을 갈아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지만 그 기회가 올 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칼을 간 사람만이 선택되어 지니까요. 배우는 평생을 두고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해야 하는 직업이니 만큼 꾸준히 찾아다니면서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은 같이 작업을 하지만 어느 순간은 여기를 떠나게 될 터인데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배우로서 살아 남으려면 자기에 대한 수련은 쉬지 말고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누가 좋은 배우냐”고 이런 질문을 누가 할 때가 있는데, 저는 서슴없이 말합니다. “처음의 자세로 겸손하게 연습하는 배우가 가장 좋은 배우”라고요. 아무리 명성을 얻은 배우라도 현재에 이런 상태가 아니면 그는 이미 좋은 배우는 아니라고 봅니다. 연습 이외엔 장사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