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들의 일상은 일반인의 리듬보다는 한 템포가 느리다.
그러나 한 템포가 빨라야 할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할 때의 경우이다. 배우로서의 무대를 지켜온 세월과 후학을 양성하는 교단에서의 모습은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배우가 아닌 교사로서 자리 잡은 선생님의 모습은 이른 아침 가을 햇살만큼 순수한 학생들의 열정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 빛나고 있었다.
젊은 연극 학도를 꿈꾸기 위해 땀 흘리는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원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이승호는 1947년 3월 10일 전라남도 나주 태생으로 공무원 아버지와 예술적 감성을 지니신 어머니 사이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유명배우 아들이었던 같은 반 김희라의 영향으로 학교 연극반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결국에는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부모님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며 연극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69년부터 극단 [실험극장]을 오랫동안 지켜오며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였는데, 1974년 실험극단 전용극장 개관 공연으로 올린 <에쿠우스>와 출연자 세 명이 모두 머리를 삭발하고 연기에 나선 <아일랜드>는 당시 장안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연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직접 제작에도 나서 <라 롱드>, <리타 길들이기> 등의 작품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승호는 1982년에 한국극평가그룹상, 1983년에 한국연극영화예술상, 1984년에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했으며, 1983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열악한 배우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1991년 여러 뜻 맞는 사람과 힘을 합쳐 연극배우협회를 창립했으며, 1995에는 배우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극단 <예일무대> 대표를 맡고 있으며, 경기대학교 부설 스타니스라브스키연기원 화술연기과 겸임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땀을 흘리고 있다.
선생님 모습이 참 편안해 보이십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며칠 전에 실험극장에서 <서산에 해 지면은 달 떠 온단다>를 했었습니다.
1950년대 마포나루를 배경으로 한 젊은 작가의 작품인데, 오현경 선배님과 같이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니까 후배들에게도 본이 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무대에 서서 선배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싶습니다.
보통 오전에는 학교 강의가 있고, 오후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원과 나주대학 방송연예과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두 학교 모두 초창기부터 관여해 왔던 터라 애정이 남다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은 후배인 나상만 교수의 부탁으로 <서산에 해지면 달 떠 온단다>를 끝내고도 깍지 않고 있는데, 11월 중에 중앙대 동문 교수들로 구성된 단막극 페스티벌을 ‘극단 유’에서 기획을 했어요. 거기에 나 교수 작품에 출연을 하는데 나 교수가 그때까지만 부탁을 해서 지금까지 기르고 있습니다.
<서산에서 해지면 달이 떠온단다> 중에서
평소 몸에 대한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뭐 특별한 방법은 없는 것 같네요. 다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버릇이 되어서 아무리 전날 술을 먹고 늦게 잤어도 여섯 시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산책을 하는데 이것도 반드시 하는 것이 아니고 간혹 빼 먹기도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는 편이고, 예전에는 취미로 낚시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것 역시 마음 내키면 하는 것이라 평소에 하는 것은 아니고요.
어느 때부터인가 체중 관리를 겸할 겸 음식을 알맞게 조절을 합니다. 이것이 몸에 무리가 안 와서 상당히 좋더라고요. 그리고 배우가 몸에 대한 관리도 중요하지만 저는 정신에 대한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항상 맑은 정신 상태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어렸을 적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태어난 곳은 전남 나주였어요. 아버님은 경성제대 법대를 졸업한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자상하시고 예술적인 감성이 남달랐던 분이셨죠. 8남매의 4째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지요. 아버님이 경성제대를 나오셨지만 어떠한 연유로 고시를 패스하지 못해서 그걸 자식을 통해 이뤄보고 싶은 욕심이 강렬하셨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입시 때 1차로 경복고를 쳤다가 떨어지고 2차에 붙은 학교가 중동고등학교였어요. 당시 중동고등학교는 드세기로 아주 유명한 학교였지요. 운명이랄까 1학년 때 제 짝이 당시 유명했던 배우인 김승호 씨의 아들인 김희라였어요. 그 친구 덕분에 연극반엘 들었었는데, 그때의 멤버들로는 한 해 위로 전원일기에서 일용이로 나오는 박은수 선배, 그리고 일 년 후배로 국립극단에 있는 김재건과 2년 후배로 정동환 등이 있었지요.
당시 연극부는 머리를 기를 정도로 학교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각종 대회에서 많은 수상 실적을 내기도 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지요. 그 당시 축구부 일 년 예산이 15만원이었는데 연극반은 30만원이었으니까 당시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는 과했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연극에 빠져들면서 여기에 평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대학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했었는데 집안에서 허락을 안 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첫 해에는 등록을 못해 불합격처리 되고, 다시 재수를 해서 합격을 하고 67학번으로 다니게 된 것이죠.
지금이야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막상 반대에 부딪히게 되니까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입학 후부터는 내내 소극장에서 연극과 함께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남은 배역이 있으면 공연에 참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연극계의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학 생활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희 다닐 때는 연극영화과가 문과대학 소속이었어요. 동기였던 선우완 감독(前 MBC PD)이 문과대학 수석으로 입학할 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었지요.
대체적인 분위기가 선후배 간의 규율이 의과대학과 더불어 엄격했었고, 그것이 수업이나 연극 연습에 적용이 되곤 했지요. 연극도 열심히 했었는데, 지금 KBS에 있는 최상식 선배와 안병경, 서인석 등과 주축이 되어 ‘걸신당’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이 서클이 대학생 잡지에 이색동아리로 몇 번 소개가 되면서 신청자가 많아서 나중에는 심사를 해서 뽑을 정도였었는데,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대강의 규칙을 보면, ‘학생으로서 절약하면서 살 것’, ‘낭비하지 말 것’ 그리고 ‘5원짜리 이상의 음식은 먹지 말 것’ 등의 규약을 정하고 나름대로 검소하게 살자는 뜻을 실천하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만들었는지조차 희미한 동아리인데 재미나는 기억이 참 많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업 후에는 흑석동 대극장 한 켠에 있는 소극장에서 매일 지내다시피 했었는데,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난로에다 의자를 잘라서 불쏘시개로 떼곤 했었는데, 그걸 우리는 ‘황소 잡는다’라고 했거든요. 그럴 즈음이면 총장이셨던 임영신 박사님이 나타나서 짐짓 모른 체하시면서 ‘황소 한 마리 더 잡아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연을 앞두고는 조명 기기를 학교에서부터 짊어지고 한강을 건너 충무로까지 들고 갔던 일하며, 어려웠었지만 학교에서의 일들은 훗날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지탱하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2007년 공연된 실험극장 정기공연 <심판>에서, 학전블루극장
실험극장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을 정도로 고정된 레퍼토리가 많다고 봅니다. 대학 때 입단을 하신 후로도 계속 실험극장을 지켜 오셨는데요?
기질 탓인지 저는 한번 연을 맺으면 오래 동안 지속하는 편입니다. 가게를 가거나 식당을 가도 한 곳을 가게 되고 물건을 산다는 느낌보다도 정을 맺는다는 데에 더 큰 의의를 두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1969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 재학 시절 실험극단 모집 공고를 보고 바로 그 다음 날로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는 사무실로 가서 접수를 했어요. 30명 모집에 130여명 정도가 응시를 하였고, 며칠 후 영광의 합격 통지서를 받고 예비 실험 식구로서 벅찬 마음을 가라앉히며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요. 32년이 지난 지금 나 혼자 남아 있었지만 당시에는 현재 극단 민예 대표인 정현씨와 로뎀의 하상길 씨가 같은 동기였지요.
첫 데뷔작은 윤대성 作 <막난이>로 시작을 했었고, 그 후 <맥베드>, <우리읍내>, <허생전>, <씨라노 드 벨주락>으로 이어 졌어요. 당시 명동에서의 작품 활동은 “∼외 다수”였던 시절이었어요. 이름 석 자 못 올리는 연구생 시절에 겪어야 할 통과 의례였지요. 선배님들의 이름과 함께 기재되기란 있을 수 없는 때였죠. 누군가 물어보면 내 이름은 “∼외(外) 다수”라고 하면서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했었지요.
이후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고 71년부터 74년까지는 본의 아니게 연극과는 멀어졌지요. 그러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74년 실험극장에 다시 복귀하고부터는 총무 일을 겸해서 공연 외에도 극단 살림살이며 더욱이 운니동에 있는 에덴예식장을 인수하고 나서는 실험극장 전용극장 건설을 하는 일을 맡아 하는 등 참 바쁘게도 보냈었지요. 공사 오 개월 만에 극장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분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감격스러웠지요. 개관 공연으로 <에쿠우스>의 막이 오르면서 그 찬란한 실험극장 전용 극장 시절의 팡파르가 울린 것이죠.
40년 가까이 배우로서 활동하시면서 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1974년 실험극장의 운니동 시절 때 극장을 만들면서, 실험극장 전용 극장 시절의 서막이랄까 개관 공연으로 올린 <에쿠우스>가 무엇보다도 기억이 남습니다. 강태기가 알런으로 나왔고, 저와 김동훈 대표가 다이샤트 의사 역으로 더블 캐스팅이 되어 대 배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하는 자부심이 든 공연이었지요. 당시 <에쿠우스>는 요새 말로 대박 행진을 계속하면서 한국 소극장 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장식한 작품이 되었지요.
그리고 1977년 아돌 후가드 作 <아일랜드>는 서인석과 연출을 맡은 윤호진과 함께 셋이서 도원결의를 맺고, 머리를 완전히 삭발을 하고 나서 6개월간의 지독한 연습과 8개월간의 장기 공연으로 또 하나의 레퍼토리를 이룰 만큼 좋은 공연이었어요.
죄수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법정을 드나들기를 수차례, 거기서 양심수들의 표정과 언행을 세밀히 연구하고 그들의 심리를 끌어오기 위해 흑인 죄수 분장으로 삭발상태에서 열연을 다 한 공연이었지요. 이 후에도 <아마데우스>, <신의 아그네스>, <사람의 아들>, <안티고네> 등 한국 연극사의 기록에 남을 공연들이 많았었지요.
<에쿠우스>에서 다이사트역 아래는 연극열전의 조재현
77년 윤호진 연출의 <아일랜드>에서 좌측은 서인석
배우협회를 창단하는 데 일조를 하시고 지금도 부회장직을 맡고 계신데요?
배우협회는 연극협회 내의 배우분과를 확대 개편해서 배우로서의 권익 향상과 친목도모를 위해 1991년 만들어 졌습니다. 처음에는 송별 기념으로 배우협회 기념공연도 하고, 고설봉 선생님 팔순 기념공연을 만들면서 차차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배우의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어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는 배우협회가 체계를 갖추게 된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몇 편의 연극은 제작까지 하신 걸로 아는데요?
세 개의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제법 흥행을 했었습니다.
그 첫 작품은 아더쉬니칠러作 <라 롱드>라는 작품이었어요. 작품이 순탄하게 흥행가도를 달릴 즈음 어느 날 인쇄업자가 찾아 왔기에 그 길로 밀린 대금 500만원을 결재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이 <리타 길들이기>이었는데, 이 작품은 맨 처음에 옥소리와 같이 하기로 하고 신혼여행 다녀온 후부터 연습에 들어가기로 다짐을 받아놓은 작품이었는데 남편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누구의 소개로 어느 카페에서 전도연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명이었던 배우였는데, 이 작품이 흥행하면서 덩달아 동시에 찍고 있었던 영화 <접속>이 히트를 치면서 단숨에 유명해 지더라고요.
그리고 세 번째 제작했던 작품은 <싸리타>라는 작품이었는데 청소년들의 성장과 정체성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에 구성애 씨까지 찾아갈 정도로 열정을 보인 작품이었지요. 극단에 속해 있다 보면 선택되어 지는 배우의 특성상 자신의 욕망으로 꽃피우고 싶은 작품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의미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은 그런 욕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 주어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다들 성공해주어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연극계를 지켜 오시면서 현 연기 교육의 문제점이랄까 현상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쉽게 연기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실험극장 시절 배역에 이름이 못 오르고 “∼외(外) 다수”인 시절이 5년간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빨리 자기 이름에 배우라는 직함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데뷔는 빨리 하는데 그것이 얼마 못 가는 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무대에 너무 쉽게 서게 되면 노력을 더디 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너무 쉽게 얻어져 버리면 너무 빨리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배우에게는 일정한 수련 기간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말은 하면서 배우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모순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입문을 할 때 너무 또래들끼리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조금은 전통이 있는 극단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기네끼리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있는 데에서 어느 정도 통제와 지적을 받아가면서 훈련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구로자와 아끼라가 영화로 만든 연극 <나생문>에서 나뭇꾼 역을 맡아서, 연강홀
화술에 대한 평소의 생각은?
요즘의 경향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말이 참 빨라요. 그래서 말에 대한 의미 전달이 약합니다. 아마도 세태적인 경향인지는 모르지만 연기자는 무릇 말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럴 때 말을 나름대로 머금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활자에 쫓기지 말고 활자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사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때 말의 맛이 살아나거든요. 같은 말이라도 맛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연기자의 몫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표준어가 서울 중류 이상 일반 대중이 쓰는 말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언어학자이신 어느 프랑스 신부님이 말씀하시길 전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전라도 사투리라는 지적에 동의를 합니다.
가령 “좋다!”라는 말이 표준어라면 이를 전라도의 경우는 “워메 좋은 것!” 또는 “왔다 저거 좋네”라는 표현을 씁니다. 즉 말의 맛이 살아 있는 경우이죠.
일괄적으로 표준어라고 못박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언어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맛이 있고 멋이 있어야 하는데 화술이랍시고 국문학자를 데려다가 우리말의 표준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말의 맛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하시는지요?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정답은 없는 법이지만 경험에서 터득된 방법은 있다고 봅니다.
말은 소리로 표현하는 것인데, 말과 행동은 반복된 훈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의 느낌은 생각을 통한 분석으로 나온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의 느낌을 어떻게 control해서 전달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기능 이전에 삶의 연륜이 묻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즉 하나의 대사를 가지고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것을 여러 각도에서 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사와 대사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잘 캐치해 내어야 합니다. 극이라는 것은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하나의 감정만 가지고 지속된다면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늘어지게 됩니다. 어느 대사 하나에다 포인트를 두고 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느낌이 틀려집니다.
가령 “야! ① 우리 ② 집에 ③ 가자 ④”라는 단순한 문장이 있습니다. 야! ①에 강조를 두고 크게 말을 해 보면 주위에 환기가 됩니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야! 하고 외치면서 주위의 시선을 모으는 역할을 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 ②에 강조를 둘 때는 우리 집 즉 My Home이 강조가 되고, 집에 ③을 강조하면 각자의 집이 두드러지고, 가자 ④를 강조할 때는 그냥 각자 파하자라는 뜻이 됩니다.
즉 같은 말이라도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에 따라 그 뉘앙스는 천차만별로 틀려지게 되죠. 따라서 저는 문장을 일률적으로 끊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전체 문장의 맥락을 파악하고 어디에서 끊을 것이냐는 그 다음의 문제라는 거죠.
언어교육의 문제점을 든다면?
요즘 언어 교육의 문제점을 들라고 하면, 제일 큰 원인은 텔레비전에 있다고 봅니다.
세뇌교육처럼 무차별로 들이붓는 잘못된 표현과 광고들 때문에 말이 빨라지고 있어요. 그래서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말을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배우를 지망하는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현상은 치명적인 결함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배우로서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작품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우선 작품을 받아서 처음 리딩을 하면서, 전체에서 주어진 배역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배우는 에고이스트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배역을 좀 더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되도록 전체에서 객관적으로 배역에 접근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대본을 읽으면서 시각적으로 떠올려 보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작품 안에 주어진 인물에 대한 분석을 시작합니다.
<동천홍>에서
대사를 외우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대사 역시 전체의 사건의 흐름을 따라서 이해를 하고 나서 이를 에피소드 단위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강의 이야기의 흐름을 알게 되면 저절로 외워지는 것 같아요. 어떤 배우의 경우는 소소한 어미나 음절 단위도 꼼꼼하게 외우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대강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연출가가 있다면?
연출가는 두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배우의 역량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과 배우를 통해서 자기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전자의 경우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각각 연출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연기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 있는 경우에는 배우를 믿고 맡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봅니다. 저는 실험극장에서의 때부터 함께 해 온 윤호진의 스타일을 믿고 존중하는 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우선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많은걸 주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가르치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각 학교에서 워크숍 공연 때 ‘연기 트레이너’로 참여해서 현장의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연기라는 것이 강단에서의 수업도 필요하지만 같이 작품을 하면서 길러지는 것이 더 많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번 제작해 보고 싶습니다. 전에 실험극장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이낙훈 선배와 같이 윌리 로먼에 캐스팅이 되었었는데, 무슨 사정인지 이낙훈 선배가 도중하차를 하면서 이 배역이 다른 배우에게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연출이 저를 아들인 비프 로먼으로 캐스팅을 했었는데, 배우생활 40년 만에 캐스팅을 거절한 적이 그때가 처음일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작품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정도 있었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에 언젠가는 이 작품을 반드시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