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는 여러분에게 진실의 모습을 띤 환상을 보여줍니다만, 저는 환상이라는 즐거운 가면을 통하여 여러분께 진실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테네시 윌리엄즈의 <유리동물원>에 나오는 톰의 대사
1925년 9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난 백성희는 동덕여고 시절 무용에 매료되어 ‘빅타 무용연구소’의 연구생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에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19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하여 연극 <봉선화>로 데뷔하였다. 이후 극단 [신협]을 거쳐 25세에 국립극단에 입단하여 지금까지 61년 동안 국립극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수많은 연극에 출연하였다.
1962년 5월 문예상을 시작으로 하여 1964년 한국연극상, 1966년 동아연극상, 1988년에는 동랑연극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94년에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하고, 1999년에는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과 제 46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동시에 수상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3.1문화상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으며, 문화훈장 보관장과 은관문화훈장 등 두 개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국립극장 단장과 연극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현재는 국립극단 종신단원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건강하시지요?
몇 주 전에 다리를 다쳐서 겨우겨우 다녀요. 병원만 왔다 갔다 하는 정도지 뭐.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더라도 감사합니다’하고 가야지. 있다가 ‘백성희·장민호 극장’개관을 한다고 해서 가 봐야 돼요. 그리고 뭐 항상 하는 말이지만 감사하지.
건강관리는 어떻게?
젊었을 적부터 무용을 했던 덕분에 지금도 몸이 늘 그 체중을 유지해요. 배우는 몸이 연기의 도구 아닙니까. 그렇지만 무슨 헬스니 이런 델 가지 않아요. 20대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이 있어요. 내가 그냥 자리 운동이라고 얘기하는데 스트레칭 같은 거죠. 20대부터 늘 했던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보통 30∼40분 하고 시간에 쫓길 때는 20분도 해요. 가끔 새벽 집합 때문에 못 하고 쫓아 나가는 날은, 어쩌다가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고 나면 몸이 여기 저기 찌뿌듯하다고 그러는데 나는 못 한 날이 그래요. 둔하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거네요. 그게 제 건강관리 비결이에요.
담배도 하고 술은 좋아해요.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술 담배를 자제하지만, 너무 하고 싶어서 또는 못 끊어서 안달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그리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다른 운동은 안 하시나요?
안 하죠. 할 시간도 없고. 잘 알겠지만 우리 연극이 얼마나 많은 운동량을 요구하는 거예요. 소리 지르면서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는 거리만 해도 만보 걸음이 무색할 정도인데요. (웃음) 조용히나 걸어요? 악쓰지, 웃고 울지, 대단한 운동이에요.
더구나 아침에 신체 훈련이라고 해서 몸을 유연하게 만든다고 운동하고, 사실 다른 운동이 필요 없어요.
담배는 요즘도 하시나요?
조금 줄이고는 있는데 하도 주위에서 만류해서 눈치 보면서 피해 다니며 피웠더니 조금씩 줄더라고요. 옛날에는 꼬박꼬박 한 갑씩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 피죠. 의사 선생님은 피우지 말라고 하죠. 줄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이제 와서 좋아하는 거 안 피울 필요 뭐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세요.
내 주치의 말에 의하면 담배로 인해서 신체상의 어떤 병에 이르려면 15년 전이래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암에 걸렸다고 하면 15년 전 어느 날에 걸린 거예요. (웃음) 그런데 지금 뭐 하려고 끊겠어요?
집단예술이라는 게 우리가 항상 모여서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못 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서, 더군다나 연습실 같은 데서 혹은 국립극단 같은 경우는 밖의 로비에서도 못 피우는 곳이라 많이 참아요. 그러니까 빈도도 줄고 개비도 줄고 그러더라고요.
1965년 복혜숙, 조은파 씨와(오른쪽 앞, 뒤)
1966년 <그 길고 지루한 여름> 공연에서
이기홍, 고설봉 씨와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하셨나요?
20대 후반이니까 28∼29살 때부터였을 거예요. 50년이 넘은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끊으라고 하는 것도 잔인한 것 같고 끊자니 좋은 친구 하나를 잃는 것 같은,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을 놔 버린 듯한 느낌이에요. 감기가 들면 나는 기관지가 안 좋으니까 그럴 때면 가슴이 뻐근하거든요. 그러면 안 피워요. 그렇게 안 피우기 시작해서 3개월 혹은 6개월까지 가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흡연실에 가면서 늘 “선생님∼”하고 불렀는데 그때는 알아요. “선생님, 담배 안 피우시죠?” 하고요. 그러다가 조금 괜찮으면 따라 나가서 담배 한 대 달라고 하면 “어, 피우세요?” 그러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서 피우죠. 그래서 며칠을 안 갖고 다녔는데 너무 얻어 피우는 것 같아서 그 다음에는 담배를 사서 하나씩 나눠줬어요.(웃음) 그게 시작이 돼서 또 피우게 돼요.
술 좋아하시잖아요?
술은 많이 먹는 편이에요. 어떤 분이 주량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난 모르는데요” 했죠. 처음에는 소주 한 병만 먹겠다고 앉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나서 한 병 먹고 끊는 게 아니죠. “선생님!” 하고 주면 또 받고 “한 잔 더 하시죠” 하면 또 받고, 그러다보면 지나치잖아요. 주기가 확 퍼지면 인사불성이 돼서 그 이후부터는 얼마를 먹는지 모르는 거예요. 술이 술을 먹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주량을 나한테 묻지 말라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연극을 하시게 된 거예요?
1954년 월간지 「희망」 표지의 모습
연극하기 전에 ‘빅타 무용 연구소’에 들어가서 무용 기초를 배웠어요. 그때가 18살, 고등학교 때였어요.
춤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작은 외삼촌이 그때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계셨는데, 어느 해 나오시면서 ‘다카라즈카 소녀가무단’의 팜플랫을 들고 나오셨어요. 그 팜플랫이 워낙 두껍고 큰 책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총 천연색 화보가 없을 때니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슬쩍 봤더니 웬 미남들이 도열을 해서 다리를 칼로 벤 것처럼 쫙 뻗치고 서 있는데, 실크 모자에 연미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과 뒤 조명, 그리고 흑백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데 거기 한 가운데에 미끈한 남자 하나가 실크 모자를 살짝 벗어 들고 한쪽 손에 단장을 들고 서 있는데, 그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는데, 너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이 남자, 정말 잘 생겼다∼!”는 말이 나왔어요.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도 나중에 들어서 알았어요. 그러니까 삼촌이 “야, 임마! 그거 남자 아니야, 여자야!” 그런 거 보는 거 아니라고 책을 뺏겼지만 여자라는 말에, 나도 이걸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충격 같은 걸 받고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랬다가 고등학교 가서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빅타 무용연구소 연구생 모집’ 그걸 보고 쫓아가서 오디션을 본 거예요. 그 광고를 보는 순간 학교고 집안이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옛날 팜플랫에서 봤던 사진하고 외삼촌이 여자라고 했던 생각만 가득 차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신문 들고 벌벌벌 떨기만 했어요.
그래서 그 이튿날 학교를 안 가고 학교 가는 길에 신문에 난 주소를 보고 찾아가서 시험을 쳐서 합격이 됐어요. 나중에 보니까 빅타 가극단 전속 무용단이에요. 거기에서는 무용의 기초를 배웠어요. 우리 무용도 배우고 발레도 배우고, 무용을 배우니까 음악은 저절로 배우고, 그런데다가 성악과 목소리도 훈련을 시켜요. 곁눈질 할 사이 없이 그거 쫓아가는 것만 해도 바빴어요.
집에서는 빅타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이 된 건 아셨어요?
연히 모르죠, 그때까지 학교도 결석하면서 들락날락 정신없이, 요령껏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 가면서 배웠어요. 그런데 거기 소정 과정을 마치면 발탁을 해서 빅타 가극단에 편입이 되는데, 내가 하도 눈을 부릅뜨고 해서 그런지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발탁이 되었어요. 미리 단원이 된 거죠.
그때 빅타 가극단이 나중에 자유당 때 서민호 씨라고 벌교 쪽의 국회의원이 계셨는데 이 분이 사장이셨어요. 독립투사들의 자금책이었다고 해요. 일제 때 경계가 삼엄하니까 일본에서 유명한 빅타 레코드 회사의 간판을 빌려서 빅타 가극단을 만들어서 그 분이 운영을 하셨던 거예요.
서항석 선생님이 거기 전속 작가로 되어 있으셔서 뭘 주로 했느냐 하면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이런 소설들을 가극화했어요. 내가 거기 가서 제일 처음 한 것이 심청전인데 ‘뺑덕엄마’ 역을 했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에밀레종>을 했는데 혜공왕 어머니인 ‘섭정왕후’ 역을 했어요.
그런데 서항석 선생님이 함세덕 선생님과 아주 친하세요. 서항석 선생님이 각본하신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면 함세덕 선생님이 와서 보시고, 또 함세덕 선생님 작품이면 서항석 선생님이 가서 보시고, 그렇게 오고 가고 하시는 동안에 내가 맡은 역인 뺑덕엄마와 섭정마마 역할을 함세덕 선생님이 다 보신 거예요.
그러더니 어느 날 서항석 선생님한테 저 아가씨 연극에 소질 있다고, 연극하도록 권해보라고 그러셨대요. 그래서 서항석 선생님이 나한테 오셔서 “연극 안 할래?” 하시길래 연극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문학으로 치면 연극은 순수문학인 거고 이건 대중문학이라고 쉽게 알려주셔서 연극이라는 두 글자를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1965년 시민회관 분장실에서.
오영진, 뮤지컬 싱어 메리 마틴, 백성희, 이근삼
집에는 언제 들키신 거예요?
그동안 들락날락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밤중에 <심청전> 공연을 할 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터놓고 말씀을 드렸죠. 집에서 난리가 난 건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에요. 멀쩡한 집안에 웬 딴따라냐고.
그래서 얼마나 혼이 났으면 내가 연극을 하는 것은 우리 집안뿐만 아니라 사회에 아주 나쁜 짓을 하는 거라는 죄책감 때문에 죄인처럼 살았어요.
나는 수십 년 동안 연극하면서 누가 물어도 학교가 어딘지, 집안 식구가 누구인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어요. 성까지, 이름까지 다 바꿔버리고, 나는 아주 몹쓸 짓을 하고 있는 타락한 어느 집 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백성희란 성함은 누가 지어주신 건가요?
서항석 선생님이 지어주셨어요. 아버님이 지어주신 본명은 이어순이(李於順伊)에요. 내가 멋모르고 빅타 가극단에 들어가서 연극배우한테 필요한 거 배웠잖아요. 몸 유연하게 하는 율동 배웠지, 성악 배웠지. 그리고 서항석 선생님과 함세덕 선생님의 권유로 연극을 정식으로 하게 된 거죠. 현대극단에 가서 곧잘 했어요.
그런데 기회도 좋았던 게 극단의 현대극장이 유치진 선생님이 대표로 계셨고 일본에서 돌아온 신극파들이 손잡고 그 단체를 조직해서 공연을 계속했는데, 거기서 김선영 선생님과 젊은 배우가 주인공이었는데 젊은 분이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현대극단에 가자마자 대역을 하게 되었으니까 주인공으로 데뷔를 한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연극 쪽에 발을 들일 때 그 당시에는 아주 복잡하고 죽을 결심을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겪었는데, 내가 죽어도 그것만 하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옆에서 밥도 안 먹고 있으니까 죽는 것보다는 연극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시고, 할머니는 “그거 나쁜 거 아니란다, 아범아∼. 심청이도 하고 그러는 거란다” 조언도 하신 덕분에 그 덕을 보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버지가 그거 할 거면 나가서 하라고, 내 딸 아니라고 하시고 그래서 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배우가 되시고 나서 아버님께 용서는 받으셨나요?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연극 오래했는데 한 번도 와서 보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연극은 용서를 안 하셨는데 시집가서 아들도 낳고 제 가정을 이루고 사니까 “내 자식 아니야” 라는 말씀은 스스로 취소를 하신 거죠.
아무튼 그 난리를 겪고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연극 입문하고 아버님도 해결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낳고, 지금까지 쭉 해보니까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죠.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배역에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게 연극인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연극으로 가게 된 것도 권유나 발탁으로 인해서 오늘날까지 계속 해왔지, 연극도 내가 이 배역이 하고 싶다거나 누가 훌륭한 상을 탔는데 나도 그 상 한 번 타보고 싶다거나 그런 쪽을 모르고 살았던 거잖아요. 바보스럽도록 모르고 살았어요.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되셨어요?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까지 그렇게 반목을 하고 외롭잖아요. 평소에 말이 없고 책 하나 들고 연습장에 가서 주어진 대사 하고 나면 구석진 곳에 앉았어요.
나중에 빅타 가극단의 서민호 선생님이 구금이 되서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서 반도 가극단으로 명칭도 바뀌었어요. 반도 가극단의 대표하고 남편하고 친구였어요. 남편도 이미 돌아가셨지만 집안의 형님이 나도향씨라고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를 쓰셨던 작가셨는데 26세 때 요절하셨잖아요. 남편이 동생인 나조화씨였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시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났죠. 14년 차이니까요. 지금도 나는 연애가 뭔지 모른다고 그러잖아요. 그냥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외롭게 연극을 하는데 남편이 극단에 오실 때마다 구석에 혼자 앉아서 책 보고 한 게 눈에 띈 모양이에요.
남편이 저 아가씨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사장님 눈에는 내가 굉장히 착실하다고, 두 분의 대화가 그렇게 오고 갔고 심청전 막을 열었는데 내가 무대에 나가니까 마치 낚시 바늘에 걸린 싱싱한 잉어처럼 펄쩍펄쩍 하더라는 거죠. 밤낮 연습장 구석에 앉아있던 모습이 아니고.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남편도 형님 대신에 집안의 유지를 잇겠다고 연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가서 문예 창작을 전공했어요.
그리고 해방되어서 나오니까 여기는 여기대로 배제고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해서 1번 타자였다고 해요. 남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야구 감독들이 영입을 해서 야구 쪽으로 갔는데 그때 야구가 지금 같지 않을 때잖아요. 가서 보니까 자기들이 고등학교처럼 했던 활기도 없고 프로로서 이어가자니 생활도 어렵겠고, 마땅치가 않아서 빙빙 돌던 차에 친구가 극단을 한다고 하니까 왔다 갔다 하다가 나를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은 문학 쪽에 아직도 꿈이 있어서 연연해 있고 야구계는 그렇고 하니까, 내가 했던 게 눈에 좋게 비쳤던 모양이에요.
당시 연극 서적이 한국에 하나도 없었는데 그때부터 일본에 주문하고 헌 책방 뒤져서 연극 공부를 하더라고요. 나는 순전히 연극 공부를 남편한테 배웠어요. 다 일본책으로 읽었으니까요.
그래서 공연 끝나면 항상 집까지 바래다 줘요. 저만치 우리 집이 보이는 골목에 오면 헤어지는 종점인데 성남극장 공연 때에요.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까 눈이 막 쏟아져요. 남편이 객석에서 구경을 하고 데려다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집이 신당동인데 후암동 고개를 넘어서 성남극장에서 퇴계로를 지나 신당동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후암동에서 남산을 올라가려니까 좀 미끄러워요. 하나만 넘어지면 둘이 다 넘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엎어지며 미끄러지며 한참을 걸려서 집이 저만큼 보이는 골목에 와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 날 따라 미안하더라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미끄러지는 곳을 돌아서 갈 생각을 하니까.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아저씨도 같고 아버지도 같고 정말 따랐어요. 아무 경계 없이 일본말로 ‘오야붕’이라고 하면서 졸졸졸 따랐어요. 그런데 그날 미안해요.
1966년 <이민선> 공연에서
눈 쌓인 데 가기 힘들겠다 싶어서 돌아보니까 안 가고 저만치 서 있어요. 내가 돌아다 본 순간 자기도 돌아서서, 멀지만 눈이 마주친 거예요. 왜 안가고 있지? 하고 생각하는데 슬슬슬 다가오더라고요. 다가와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나한테 시집오지?” 그게 청혼이었어요. 그게 연애 감정이라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사별하셨나요?
내가 47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들 하나 남겨 두고요. 그 이후에 재혼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나 같은 사람은 나조화 씨처럼 사랑으로, 정으로 가까운 사이를 만들어놓고 어느 날 느닷없이 다가오지 않으면 힘든 타입 같아요. 나는 배우지,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끔 하거든요.
나눔연극제에서 예술감독으로 위촉받은 후
인사를 하고 있는 백성희 선생님
대략 400여 편 넘게 작품을 하셨죠? 그 중에서 내 인생과 닮았다 혹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내가 해 본 역할치고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없죠. 그 중에서 꼽으라고 한다면 <무녀도>의 모화 정도일까요? 무녀인데 신기가 통해서 그런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리고 번역극이 그렇게 많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것이 내 몸에 와 닿고 내 피부 속에 흐르고 있는 거 같아요. 또 내용 중에 자식하고의 갈등이 있잖아요. 어떤 쪽도 거부할 수 없는, 거기서 자식을 죽이는데 신을 버리지 않고 자식을 죽인다는 게 인간의 한계인 거 같아요.
모화가 인간의 한계인 거죠. 그래도 자기네 신을 숭배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죽여가면서 모셨다는 투철한 사명감, 정신력이 좋아요.
연극계에 ‘말다리 3년’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 말은 무대에서 다리만 보이는 역할을 3년을 해야 비로소 대사와 얼굴을 내밀 수 있다는 뜻이지요.
3년 동안 아무 소리 없이 무대 경험을 통해 발성과 호흡, 그리고 작품 분석에 대한 이해도 얻을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인내의 과정을 거쳐서 무대 위에서의 짧은 한 마디 대사조차도 귀하게 여길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요즘의 배우들은 너무 빠르고 서둘러요.
존경하는 분은?
연극계에서 제일 존경하는 선배를 김선영 씨라고 그래요. 그때 김선영 씨는 현대극단, 프리마돈나였어요. 현대극단뿐만 아니라 당시에 첫 손 꼽히는 유명한 여배우였어요. 그분이 저를 예뻐하시고, 혼자 계시면 밤낮으로 불러요. 그리고 ‘열심히 해, 국립극장 네 꺼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죠. 저한테는 그분 영향력이 대단히 컸어요.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만 선배들 흉내를 내다가 자기화 되잖아요. 그때 전 어쩌면 김선영 씨를 흉내 냈었는지도 몰라요. 월북 하신 김선영 씨가 연기의 스승이었다면, 유치진 선생님은 연극의 정신을 심어주신 분이시죠. 유치진 선생은 아주 여성스러운 분이세요. 체구는 크고 잘 생겼는데, 목소리가 가늘고 말투도 아주 고왔어요. 하지만 그 분이 연출하면 일단 모두 긴장했어요.
명동 성당 밑에 베이비 골프장이 있어요. 하루는 저랑 최은희 씨랑 점심 먹고 그곳에 갔죠.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서 기다리다가 둘 다 여배우니까, 유치진 선생한테 애교떨자고 하고 한 10분 늦게 들어갔어요. 근데 도착해 보니 유 선생님이 화를 내시는데, 손을 허리춤에 놓고 부르르 떠시더라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술이 시간이에요. 시간 관념 없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겁니까, 그만 두세요. 다들’하시는데, 예술가의 혼을 발견했다고. 눈물 뚝뚝 흘리고 잘못 했습니다 했죠. 저도 아직 그래요. 사석에서는 흉허물 없지만, 약속 시간에 늦거나 연습을 안 하면 불벼락이에요.
1954년 명동 베이비 골프장에서 최은희(왼쪽), 강유정(오른쪽)
선생님의 인생에서 연극은 뭔가요?
나는 연극에서 정직을 배웠어요. 무대에 나오면 연습 때 게으름 피운 것이 다 나타납니다. 연극을 너무 가볍게 대해서는 안 돼요. 무대에서는 배우의 인격이 드러나므로 품격 있는 연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할 수 있는 얘기로 ‘연극은 내 생명’이라고 그러죠? 내가 생명은 아니고, 지금은 연극하고 나하고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죠. 연극이 나고 내가 연극입니다.
젊은 연극인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연극이란 건 육성을 쓰죠. 무대에서 혼자 관객을 흡입해서 끌고 가는 게 연극이거든. 카메라, 편집, 아무 것도 도움 주는 게 없어요. 이런 연극의 기초를 다 잊고 가요.
연극 배우는 예술인이라는 긍지를 가질 만큼 자기 연마를 해야 돼요. 연극은 무대 예술의 뿌리라고 생각해요.
뮤지컬, 오페라, 드라마 이런 극을 위해서는 뿌리인 연극이 건전해야 하거든. 잎사귀고 싱싱하고 좋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국민한테 영향을 주는 거죠. 매스컴의 스타가 되고 싶은 사람도 기초를 닦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