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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서산을 물들이는 노을처럼>

엑터타임즈 2025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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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은 산자락을 넘어서는 그 언저리에서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아마 이는 사람의 인생에도 적용되지 않나 싶다. 노년의 배우가 고희를 맞아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던 작품을 가지고 무대에 섰다. 일주일 동안 내린 비로 인해 나무들이 잎새를 떨구고 있는 겨울 초입, 대학로에서 조금 떨어진 연강홀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1935년 목포에서 태어난 김길호는 연기보다는 먼저 희곡으로 연극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6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딸>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당선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매치기>로 당당히 당선되었다. 이후 계속 목포에 머물며 연극 활동을 하면서 목포극협회 대표를 맡기도 했으며, 목포방송국의 연출부 부장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는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위해 서울 근거지를 옮겨 <느릅나무 그늘 아래 욕망>, <아마데우스>, <침향> 등 수 많은 연극에 출연하였는데, 그 중 <아마데우스>는 그가 가장 애착이 가는 연극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그이지만 연기에의 소질은 남달라 1985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서울연극제 연기상, 한국연극상을 수상했으며, 이 해에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 먼저 고희 공연을 축하드립니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근황이 어떠신지요?

건강에는 늘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평소에 자주 쉬려고 하는 편입니다. 이번 작품은 전부터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1980년인가 극단 󰡔춘추󰡕에서 <아마데우스>를 하려고 했는데 그 때 연출을 맡았던 최영란이라는 연출이 이 작품으로 데뷔를 하려고 준비를 하려던 작품인데, 저한테 살리에르 역을 제의하면서 말끝에 ‘선생님 억양에 일정한 조가 있어서…’ 하기에 그냥 내팽겨쳤지요. 사실 연출가 입장에서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막상 그만두고 나니까 후회가 되더라고요. 결국 그 역은 최상현 씨에게 가 버렸어요.

두 번째는 1983년 문고헌 연출로 송승환이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맡고 제가 샬리에르를 맡아 연습을 하는데 연습 도중에 넘어져서 그만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이승호 씨가 대신 맡았지요. 그러다가 20년이 흘러서 작년에 문고헌 연출과 고희 기념으로 무슨 작품을 할까 의논을 하다가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그래서 연습에 들어갔는데 살리에르 역은 도저히 대사 량이 많아서 자주 잊어버리고 하니까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이 역을 권성덕 씨에게 부탁을 하고 저는 황제인 죠셉 2세 역을 맡게 된 것이죠.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같이 무대에 서니까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고희기념 무대를 마련해 주니깐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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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기자간담회에서 김길호, 김소희, 오현경, 윤석화,

한명 정호빈(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유난히 기억력에 대해 자신 없어하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실례지만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셨는지요?

예전에 명동에 있는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당신 멋대로 해라>라는 작품을 마치고 머리가 너무 아프고 흐리멍덩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묻기를 “언제 심하게 머리를 다쳤거나 충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하고 물어요. 그래서 곰곰 생각을 해 보니까 어렸을 적에 눈썰매를 타다가 ‘꽈당’하고 넘어진 일이 한 번 있었고, 학생 시절에 데뷔작인 <별은 밤마다>공연을 하는데 제가 맡은 역할이 빨치산역할이었어요.

여기서 빨치산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있는데 군인들한테 물어 보니까 총을 맞으면 비틀비틀하면서 그렇게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바로 ‘팍’하고 고꾸라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공연 때 바로 쓰러졌지요. 처음엔 머리에 충격이 왔는데 ‘까짓거 뭐 대수이겠나’ 싶어 공연 내내 그렇게 했었지요.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그것이 나중에 후유증으로 남더군요. 그래서 언제서부터인가는 가급적으로 대사 량이 많은 역은 피하게 되더라고요.

목포에서 연극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어떤 연유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차범석 선생님은 연희전문을 나오시고 6.25사변이 나자 고향인 목포에 낙향을 하셨지요. 선생께서 1951년 목포중학에 교편을 잡고 계실 때인데 목포에 있던 해군기지에서 3.1절 기념예술제를 열었고 거기에 연극이 들어갔어요.

배우 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차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이 연극은 일주일 공연 예정이었는데 앙코르까지 받아서 보름 간 공연했던, 당시로서는 열렬한 반응을 얻은 공연이었습니다. 너무 반응이 좋아 공연이 끝나고도 소위 순회공연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후로 연극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을 보면 참 운명이란 묘한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어렸을 적 성장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어렸을 적부터 신파극이다 뭐든 구경하기를 좋아했어요.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학교도 입학하고 나서는 그만두는 등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평탄한 소년 시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위로 한분 형님은 일본에 갔는데 행방불명이 되셨고 어머니와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삐뚜로 나간 건 아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방랑 기질이 있었다고 봅니다. 훗날 순회공연을 하다가 아버님 생전의 친구 분을 만나서 아버님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희곡 원고 뭉치를 발견하기도 했을 때는 왠지 형용못할 감정을 느꼈었습니다.

공부에 대해서는 저는 무학(無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연기는 경험과 연습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살아오면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많은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차범석 선생의 동생이셨던 고(故) 차재석 선생을 언급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네요. 남도의 시인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도 목포엘 가면 천하의 차재석을 만나야 할 정도로 그는 박학다식하고 인격적인 분이셨어요.

고관절 염증을 앓아 약간 발을 저셨는데 그의 됨됨이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 등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셨지요. 아마 목포 예술계는 이 분이 거름을 주고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장 꼭또가 장루이 바로와 작품을 하면서 같이 동거까지 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저와 차재석 선생과의 사이를 여기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저의 연극적인 지식과 예술적인 자양분은 이 분으로 인해 깊이 영향 받은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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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에 공연된 연극 <침향>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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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화 작의 <침향>에서 56년 만에 동생과 해후하는 장면

한국 연극이라고 하면 대학로에서 벌어지는 연극만을 일컫는 말로 축소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지역을 다녀보면 참 열심히 작업을 하는 것을 느낍니다. 목포 연극에서 20년 이상을 관계해 오셨는데요?

목포 연극은 대한민국 연극을 이끌어온 산실입니다. 이건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현해탄에서 윤심덕과 동반 자살한 천재 극작가 김우진이 목포 출신이고 월북한 성격파 배우 이화삼, 그리고 차범석 선생님, 이지적인 배우 최상현 씨 등이 목포 출신이시죠.

이외에도 학생극 출신의 배우 민욱, 임동진, 이정희와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김창일 씨 등은 목포가 배출해 낸 훌륭한 연극인이라고 봅니다.

1951년 <별은 밤마다>로 데뷔를 한 후 목포 연극에 다시 관계를 하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를 하고 1959년 목포 KBS에 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그 일 년 전인 1958년 예총(藝總)의 전신이랄 수 있는 ‘목포문화협회’가 만들어지고 그 산하에 일본대학 예술학과 출신인 홍순태 선생을 중심으로 가칭 ‘목포극회’가 창단이 되었지요. 홍 선생이 초대 회장이셨는데, 당시 목포 KBS에서는 선생을 중심으로 주 1회 라디오로 방송되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저는 이들을 재규합해서 본격적으로 ‘목포극협’을 창립하고 2대 회장으로 피선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서울의 우수 극단을 초청하여 공연을 가졌는데 ‘제작극회’의 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의 <공상의 도시>를 목포극장에 올렸었는데 하루 2회 공연에 700석 극장 규모에 3,000명이 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 성공 이유를 보니까 고장 출신인 차범석 선생의 작품에다 이곳에서 교편을 잡다가 영화배우로 성공한 최명수, 그리고 한전 목포지점에 근무하다가 여배우로 성공한 장신영 등 향토 연극인들이 합세한 것이 성공 원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러한 기분좋은 출발은 훗날 우리들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1960년 ‘목포극협’의 창립 공연인 알베르트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올렸습니다. 이는 당시 카뮈의 서거 직후라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 몫 했었고, 당시 지방 연극의 특성은 순수한 아마튜어리즘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하나하나 기본부터 다져간다는 의미로 이 작품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자랑스러운 점은 1962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때는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상을 타기 전이라 이 작품이 알려지기도 전인데 지역의 한 극단에서 이처럼 난해한 작품을 올렸다는 자체가 특기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서울의 직업 극단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공부하려는 자세만은 대단하다고 봅니다.

되돌아보면 저의 청춘은 거의 목포 연극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고 자라고 데뷔도 했고 결혼도 여기서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중앙 무대에 진출하신 건 언제인지요?

목포에서 이십 년 가까이 있다 보니까 갈증이 느껴져요. 그리고 결정적인 건 아내의 사업이 부진해 지면서부터 마음을 접고 서울로 상경을 했지요. 그때가 1976년이었으니까 제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였어요. 그 때는 연극을 안 하려고 마음먹고 상경을 한 건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이것 말고는 잘할 자신이 있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목포에서야 이름난 연극인이었지만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지요. 특히 관객에게는 아주 낯선 얼굴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차범석 선생 배려로 최은희 씨가 대표로 있는 ‘배우극장’에 출연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계속 일이 들어오더라고요. 배우극장에서 <천일의 앤>, <투우사의 왈츠> 그리고 산하에서 <슬픈 카페의 노래>, <제인 에어>, <산불>, 성좌에서 <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 <세일즈맨의 죽음>, <오셀로> 현대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잔다르크> 춘추에서 <드라큘라>, <겨울호텔의 7번째 테이블>, <선사인 보이즈>, <맨발의 이사도라>, <춘희>, <드레서> 등 줄기차게 작품을 했습니다. 간혹 TV나 영화도 틈틈이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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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아이다>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왕으로 분한 모습

수많은 작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시다면?

지금 공연하고 있는 <아마데우스>가 무엇보다도 애정이 갑니다. 처음 공연 때는 그만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고 두 번째 연습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서 못 했고 지금은 20년 만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꼽을 수 있는 작품은 1986년에 한 <선샤인 보이스>예요. 평생을 콤비로 무대에서 함께 일해 온 노(老)코메디언의 애증을 다룬 작품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배우 두 사람이 무대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와 닿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번역을 하신 신정옥 교수가 배우극장에 와서 읽어보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형식이며 내용이 가슴에 닿지 않았어요. 그래 자신이 없어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자꾸 읽다 보니깐 읽을수록 좋은 거예요. 그래서 후배인 최종원과 함께 했었는데 배우 둘이서 이끌어 가는 앙상블도 좋았고 내용 또한 우리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라 인상에 남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오현경 씨와 함께 한 <드레서>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그리고 <느릅나무 그늘아래 욕망>의 캐버트 역도 그렇고 <세일즈맨의 죽음>에 윌리의 형님인 벤의 연기도 평단의 칭찬을 받았지요.

선생님의 배우론에 대한 말씀해주십시오?

글쎄 배우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이론은 제가 말씀할 성질의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저 자신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서 이론에 해박한 것도 아니니 말이에요. 하지만 제 생각에 배우는 타고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어렸을 때는 선배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배웠거든요. 그때 황철 이랄찌 태을민, 김동원 선생님 같은 배우는 타고났다고 밖에 말을 못하겠어요. 여자배우로는 김선영, 문정봉, 차홍녀 같은 배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연기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부족하다 싶어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젊었을 때 좋은 공연을 본 날은 유달산에 올라가서 주인공연기자의 모습을 그려가면서 발성연습을 계속해서 하고 또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경험과 연습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고 봅니다.

살아오시면서 힘들었거나 어려웠었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저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모질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추진력도 없고 그리 부지런한 것 같지도 않아요. 뭐든지 이를 악물고 해야 되는 데 그렇게 살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으면 꼭 뭔가가 삐끗거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젊었을 때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원각사’에서 공연을 할 때 불이 나서 중단을 했던 일하며 장기영 씨에 의해 사설방송국으로 설립된 서울방송에서 일할 때에도 화재가 나서 그만 두어야 하는 등 인생에서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그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러한 일들이 생길 때 좀 더 부지런하게 대처를 했어야 하는 데 그러하지 못한 점들이 후회로 남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막내인 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아이인데 부모로서 큰 도움을 못 주었어요. 이 길이 너무 힘들어서 아들은 다른 일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밀어 주지 못한 게 녀석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컸을 거예요.

공연 중에 금기사항이나 징크스가 있으신 지요?

뭐 특별한 건 없다고 봅니다. 옛날부터 선배들이 극장에서 휘파람을 불지 말라든지 이런 건 저도 후배들에게 지적을 합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은 안 듣느니만 못하니까요. 그리고 운동선수들도 그렇게 하지만 손발톱을 깍지 않는다든지 이런 건 저도 지킵니다.

작업하면서 선호하게 되는 연출가가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문고헌 연출을 신뢰합니다. 그와는 성격적으로는 많이 틀립니다. 저는 술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 이지요. 그런데 그가 해내는 작품을 분석하는 힘이랄지 동선에 대한 계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요. 번역극도 자기의 색깔로 만들어 내는 연출가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익히 극작가로 알려진 차범석 선생님의 경우에도 연출가로서의 역량도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극단 󰡔산하󰡕가 도중에 해체되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선생과의 작업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 잡습니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할 때 만난 고(故)김상열 연출도 잊을 수가 없군요. 그것을 계기로 극단 󰡔신시(神市)󰡕와 작품을 하게 되었고 <가거라 38선>과 <LIFE> 등을 비롯하여 몇 편의 뮤지컬과 악극에도 출연을 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한때는 신춘문예에도 당선이 되셨고 1984년에는 으로 대한민국연극제에도 나오는 등 글 쓰는 일에도 관심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요?

훌륭한 작가 분들이 많으신 데 부끄럽습니다만 원래부터 극작(劇作)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지역연극은 배우의 캐스팅에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한 사람이 불시에 빠지게 되면 공연전체의 줄거리가 벗어나게 되니깐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이리저리 작품을 뜯어고치게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더군요. 정기 공연 일자는 잡혔는데 적합한 작품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 그야말로 등장인물의 숫자나 제작비등을 감안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공연을 구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가 많아서 아예 직접 써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64년 경향신문에 <딸>이라는 작품으로 당선작 없는 가작에 입선을 하게 되었고, 1967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매치기>라는 희곡으로 당선이 되었지요.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틈틈이 작품을 써서 졸작이나마 한 열 서너 편을 썼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으신 일이나 소망이 있으시다면은요?

이 나이에 특별히 이룰 일이 있겠나? 만은 그래도 꾸준히 무대에 설려고 노력합니다.

작품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서 같이 이야기하면서 연습하는 과정과 그것이 무대에 표현되었을 때의 기쁨은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선생의 고희를 기념하는 연강홀에는 많은 축하의 사람들로 극장로비가 붐볐다.

주인공에는 살짝 비켜간 역할이었지만 선생이 등장하는 씬 마다 무대가 중량감으로 가득 찼다. 아마도 훤칠하신 키에 연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아 내보일 것이 별로 없다고 하신 선생님.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고희를 맞아 공연을 할 수 있는 배우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헤아려 볼 때 선생의 깊은 겸양의 미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선생의 오랜 술벗이며 지우(知友) 이신 권오일 선생님의 글로서 마무리할까 한다.

 

“그는 성품이 맑고 깨끗합니다. 그의 천성은 담백하고 순수합니다. 그래서 뭔가 꼬불치고 감추고 덮어두고 숨기고 그렇게는 못삽니다. 맑고 순수한 예술가로서 그의 감성은 적당히 어물쩍 넘어가는 애매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때 그는 건강을 헤쳐서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의지로 깨끗이 극복하고 옛날의 건강한 모습으로 고희 기념 공연의 자리까지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우리 연극계의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데우스> 축하의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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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리뷰

불의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는 신앙을 묻다 국제성경연극선교단 제4회 정기공연 전율의 잔

2026년 01월 29일

공연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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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소식

2026년을 열어제치는 공연예술계의 신호탄 – 창작산실 드디어 시작하다

2026년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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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소식

통일은 완성이 아니라, 연습이다 – 댄스드라마 〈통일 리허설〉, 대학로에서 초연

2026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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